[풍경의 기억] 세계 최대의 옹관이 있는 곳, 전남 게시기간 : 2023-02-17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3-02-14 15:40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풍경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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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대’, ‘최고’, ‘유일’! 이 정도면 언론에 기삿거리가 되기에 충분하다. 고고학 발굴자료가 언론에 종종 등장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무엇보다 그 자체 ‘유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유일함을 넘어 최고, 최대가 되면 귀가 솔깃해지면서 더욱 주목받기 십상이다. 그런 자원을 전남은 많이 가지고 있다. 하지만 아직 그것이 대중적으로 알려지지는 못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찾아 정리해보고자 한다. 그중의 하나로 이번에는 세계 최대의 옹관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1. 영산강 유역 특유의 고대 묘제, 옹관고분(甕棺古墳) 선사 시대부터 개성을 유지하던 영산강 유역은 3세기 단계부터 타지역, 특히 백제 중앙정권의 문화상과는 확연히 다른 독자적인 문화를 유지, 발전시켜 갔다. 그런 것 중 대표적인 것이 ‘옹관고분’이다. ‘옹관고분’은 ‘옹관묘’와도 구분되는 영산강 유역 특유의 고대 묘제를 지칭한다. ① 옹관묘란? 우선 옹관묘란 무엇인지 알아보자. 옹관묘는 독널무덤이라고도 하는데, 흙으로 빚어 구운 용기에 시신을 담아 묻는 묘제를 말한다. 즉 사람의 뼈를 세골[洗骨, 한 번 매장한 시신을 꺼내어 뼈만 씻어서 다시 장사지내는 풍속]하여 이차장(二次葬)으로 묻거나, 어린아이의 시신을 펴묻기[伸展葬 또는 直肢葬이라고도 한다. 시신의 팔다리를 바로 펴서 안치하는 매장법으로 굽혀묻기[屈葬]에 대비되는 말이다]를 하는 데 썼다.1) 옹관묘는 선사시대에 널리 사용하던 보편 묘제로서, 우리나라에서는 신석기시대부터 사용하였고, 철기시대에 들어와 일반화되었다. 기원전 2세기경부터 전북지역에 등장하고 전남지역으로 확산되는 것은 기원전 1세기경부터였다. 옹관묘는 일상용기형 토기를 옹관으로 사용하는데, 처음에는 한 개의 독 뚜껑을 덮어 세워서 묻다가 초기 철기시대에 들어서면 비슷한 크기 두 개의 독 입구를 맞대거나 끼어 넣어서 관[合口甕棺]을 만들고 이를 눞혀서 묻는 방식으로 바뀐다. 즉 단옹의 직치(直置)가 아닌 합구된 횡치(橫置)로 바뀐다. ② 옹관고분은? 이에 비해 옹관고분은 3세기 후반경부터 6세기 전반경까지 영산강 유역에 집중 분포하는데, 분구(墳丘)를 가지며, 관으로 쓰기 위해 따로 만든 전용대형옹관을 사용하는 특유의 대형옹관고분을 가리킨다. 지금까지 전남지역에서 100여 개소가 확인되었다. 특히 영산강 유역 중하류인 나주, 영암지역을 중심으로 대형옹관이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다.2) 이와 같은 분묘유적은 나주시, 함평군, 영암군, 해남군의 순으로 많이 발굴조사 되어 있다.3) 우선 관으로 사용한 옹관이 독특하다. U자형 대형전용옹관을 사용하였는데 보통 2개의 옹관을 합구(合口)하여 가로로[橫置] 매장하고 있다. 합구 옹관의 크기는 길이가 보통 2m가 넘고, 3m를 넘는 것도 있다. 또 고분(古墳)이라 하면, 성토(盛土)를 한 묘란 뜻인데, 언덕[丘]만큼 커다란 흙무덤[墳], 즉 분구(墳丘)를 조성하는 방식의 무덤이다. 실제로는 분구를 먼저 쌓은 뒤 그 안에 매장주체부를 두는 독특한 묘제였다. 형태도 다양한데, 원형이 많지만 방대형이나 장타원형, 장고형도 일부 발견된다. 그리고 특히 그 규모가 매우 커서, 고분 분구의 직경이 20~30m 되는 것이 보통이고, 40m에 달하는 것도 있다. 높이도 최대 9m에 달하기도 한다. 이처럼 커다란 봉분을 이루고 있어 이를 고총고분(高塚古墳)이라고도 한다. 이 정도 크기면 삼국의 다른 왕릉에 버금간다. 이처럼 고분도 크고, 옹관도 커서 이를 대형옹관고분이라 부른다. 또 특이한 것은 무덤에 한 기의 옹관만을 묻는 게 아니라 여러 개의 옹관을 함께 묻는 경우가 많았다. 지상에 성토한 큰 고분 안에 적게는 2~3기, 많게는 9기에 이르는 옹관을 묻었다. ③ 옹관고분의 분포와 그 성격 전남 지방의 옹관묘 및 옹관고분은 영산강 유역 및 서남해안 일대에 분포되어 있다. 3~5세기 전반경에는 영산강 지류인 삼포강 연변에 접해 있는 영암군 시종면이 그 중심지를 이루다가, 5세기 중반을 넘어서면서 중심이 삼포강을 따라 상류 쪽으로 이동하여 나주시 반남면 일대가 최고의 중심지를 이룬다. 5세기에 고총고분이 축조되면서 옹관 규모도 최대화한다. 이는 6세기 전반까지 유지되어 갔다고 본다. 다른 지역에서는 토광묘가 철기 시대 지배층의 주된 묘제였고 옹관묘는 부차적인 묘제였는데 비해, 영산강 유역에서는 토광묘보다는 옹관묘가 주요 묘제로 쓰였고 선행묘제인 주구묘 단계를 거쳐 대형옹관고분으로까지 발전되어 갔다. 다른 지역과 확연히 다른 독특한 양상을 보여 준다.4) 나주 신촌리 9호분에서 출토된 금동관은 가야의 금동관에 버금가는 것으로 반남 일대에 가야 정도의 정치체가 있었음을 뒷받침한다. 이처럼 대형옹관고분 축조 시기인 5세기 후반, 6세기 전반까지 전남지역에는 독자적인 정치체로서 마한이 존속되었다고 본다. 그후 6세기 후반 이 지역 수장세력이 백제 지방세력으로 흡수된다. 백제 세력이 들어와 석실분을 구축하면서 옹관고분도 소멸되었을 것으로 본다. 대형옹관을 매장주체로 한 옹관고분은 영산강 유역 고대사회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고고학 자료이다. 옹관의 매장과 관련된 문헌기록이 없어 아쉽지만, 영산강 유역에 타지역과 구분되는 독특한 역사문화가 5∼6세기경까지 존재했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학계에서도 이견이 없다. 이를 이름하여 ‘옹관고분사회’ 또는 ‘마한’의 틀에서 이해하고 있다. 그 구체적 증거가 바로 대형옹관의 존재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백제에 복속되면서 영산강 유역의 독자적 정치세력은 그 실체를 잃어버렸다. 영산강이 안고 있는 고대의 옹관고분사회는 그 고유성으로 인하여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그리고 답을 기다리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2. 세계에서 가장 큰 옹관 전남에서 발굴된 옹관의 규모로 볼 때, 대·소옹합구로 가장 큰 것은 무안군 몽탄면 구산리 3호 옹관이고, 대옹만 볼 때 가장 큰 것은 나주 왕곡면 화정리 마산 3호분 출토 1호 옹관이다. 각각의 사정을 살펴보자. ① 대·소옹합구로 가장 큰 무안군 몽탄면 구산리 3호 옹관 구산리 고분은 철도청에서 시행하는 호남선(무안-일로간) 복선화 사업구간이 착공됨에 따라 목포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기간은 1997년 5월 9일부터 9월 22일까지였다. 유적위치는 전라남도 무안군 몽탄면 구산리 산 3-3번지 일원이다. 철도 공사측의 벌목 작업으로 인해 옹관의 상당부가 훼손된 채 지상에 노출되어 있었다. 구산리 고분은 직경 8m 정도의 원형분인 1차 분구와 그 위에 덧씌워 만든 장방형(12.2m×9m)의 2차 분구로 이루어졌다. 모두 6기의 옹관과 석곽묘, 석실묘가 각각 1기씩 조사되었다. 1차 분구는 3호 옹관묘만을 주체로 매장한 후 쌓은 것으로 층위상 가장 아래에서 노출되었다. 나머지 5기의 옹관묘는 2차 분구에 안치되어 있었다. 1차 분구 내의 3호 옹관은 두 개의 옹관이 합해진 합구식으로 합구된 전체 길이가 315㎝에 이를 만큼 크다. 대옹은 길이 168㎝ × 구경 112㎝, 소옹은 길이 157㎝ × 구경 84㎝이다. U자형 전용옹관이며 소옹은 대옹에 10㎝ 정도 삽입되어 있다. 이는 지금까지 발굴된 옹관묘 중 가장 크다. 따라서 대형옹관이 영산강 유역에만 존재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는 세계 최대의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조성시기는 3세기 후반 ~ 5세기 후반경에 해당한다. 대옹 내에서는 부장품으로 장경호 1점, 철제대도 1점, 철도자 1점, 철모 1점 등이 출토되었고, 소옹에서는 단경호 1점, 외부에서도 3점의 토기가 각각 출토되었다. 이 지역에 자리잡은 지배계층의 무덤으로 판단하고 있다.5)
② 가장 큰 대옹인 나주 왕곡면 화정리 마산 3호분 출토 1호 옹관 나주 화정리 마산 3호분은 전남 나주시 왕곡면 화정리 산 134-6번지 일원에 위치하고 있다. 나주시 향토문화유산 제15호(2006. 12.30). 이 유적은 2004년 나주-동강간 국도 23호선 확포장공사 구간 내 문화유적 지표조사를 통해 확인된 유적으로, 조사대상 유적인 마산 3호분은 2006년 9월 8일 고분 상부에 있던 민묘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옹관이 노출되어 유물의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긴급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기간은 2006년 11월 29일부터 2007년 1월 19일까지였다.6) 1호 옹관을 제외한 나머지 옹관들은 상면이 유실된 채 지면과의 접지부 일부만 남아 있었고 주구 또한 심하게 훼손되었다. 1호 옹관도 민묘 조성과 이장의 과정을 거치면서 상부가 파괴된 채 드러나 있는 상태였다. 1호 옹관은 대옹과 소옹을 합구한 합구식 옹관으로 소옹 구연부를 대옹의 안쪽으로 약 30㎝ 밀어넣은 후 회색 점토를 발라 마감하였다. 반지하식으로 횡치하였다. 목부분이 거의 퇴화된 U자형 옹관으로 대형전용옹관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옹관 내에 유공광구소호 1점과 큰 칼 1점, 그리고 집게모양 철기를 비롯한 기타 소형 철제품이 부장되어 있었다. 옹관에서 철제 큰 칼이 출토되는 예는 매우 드물다.
옹관묘 전체의 길이는 247㎝(대옹 : 길이 209㎝ × 구경 115㎝ / 소옹 : 길이 68㎝ × 구경 73㎝)이다. 이중 대옹만을 보면, 길이가 209cm로 지금까지 발굴된 대옹 중에서 가장 크다. 이 또한 세계 최대의 대옹에 해당한다. 몸체와 바닥 일부가 유실되었을 뿐, 원형에 가깝게 대부분 남아있다. 이런 점들로 볼 때 1호 옹관묘가 출토된 옹관고분은 계층분화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때는 5세기 후반경으로 옹관고분의 최전성기이자 사실상 마지막 단계의 유적이다.
3. 전라남도의 도자산업 전통으로 이어지길 세계 최대의 옹관을 만들던 문화적 역량은 어떻게 되었을까? 아직까지 대형옹관 제작기법에 대하여는 충분히 밝혀내지 못했다. 대형옹관은 크기도 대형이지만, 그에 따라 무게도 100~300㎏에 이를 정도로 무겁다. 또 이러한 크기와 무게를 지탱하기 위해서는 기벽(基壁)의 두께도 2~3㎝에 이를 만큼 두껍다.7) 가마에서 구울 때도 깨지지 않게 높은 열을 가하면서도 이를 조절하는 기술이 필요했다. 이는 일반 토기와는 전혀 다른 양상이다. 말하자면 그만큼 만들기 어려웠다는 뜻이다. 그런데 고대 영산강 유역 사람들은 왜 하필이면 이런 대형옹관을 관으로 만들어 사용했을까? 거기에는 마땅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옹관을 만들기에 적절한 흙을 구하기가 쉽거나, 가마에 구울 때 쓸 땔감이 풍부했거나 하는 등 옹관 제작에 맞춤 환경을 갖추고 있었고, 또 그에 적합한 기술적 축적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야말로 문화적 감성이 달랐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역량들은 결코 그냥 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그런 영향으로 강진 청자, 무안 및 고흥의 분청사기, 영암 시유도기, 해남 녹청자 등의 전통이 이어졌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지금 ‘전라남도 도자산업 육성을 위한 조례 제정 토론회’(2022.8.26)를 열고, ‘전라남도 세계도자기엑스포 포럼’(2023.1.5)도 개최하는 등 도자문화의 전통을 살리는 전남의 저력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을까? 1) 姜鳳龍, 「3~5세기 영산강유역 ‘甕棺古墳社會’와 그 성격」(『역사교육』 69, 1999.3, 역사교육연구회), 65쪽.
2)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한국의 옹관묘-전라남도Ⅱ』(동아시아옹관묘 7, 2015), 12쪽. 3) 전라남도의 옹관고분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내용은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의 『한국의 고대 옹관』(학연문화사, 2009) 중 「part2: 영산강유역의 옹관묘」와 전라남도·전남문화재연구소, 『全南의 馬韓 墳墓遺蹟』1·2(연구총서 제4책, 2020) 등을 참조하였다. 4) 姜鳳龍, 앞 글, 67쪽. 이 글에 따르면, 서북한지역에 나타나는 적석총은 고구려의 성립과정을 반영하고, 한강 유역 및 금강 유역에 나타나는 토광묘와 수혈식 석관분은 마한의 성립과정을, 그리고 낙동강 유역에 나타나는 수혈식 석곽분은 진·변한의 성립과정을 각각 반영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이후 경주 분지를 중심으로 나타나는 적석목곽분은 신라의 대두 과정을 상징하며, 한강 하류 및 금강 유역에 새로이 나타나는 횡혈식 석실분은 백제의 대두과정과 궤를 같이하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3세기 후반경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나타나는 대형옹관고분은 이 지역에서 특정한 정치집단들간의 결집현상이 일어나고 있었음을 반영한다고 본다. 5) 구산리 3호 옹관에 대한 설명과 관련 사진들은 목포대학교 박물관·철도청(최성락·이영철·한옥민), 『무안 인평 고분군 –학산·구산리 고분군-』(1999)을 참조하였다. 6) 마산 3호분 관련 내용과 사진들은 동신대학교 문화박물관, 『나주-동강간 국도 23호선 확·포장공사 구간내 문화유적 지표조사보고』(2004); 동신대학교 문화박물관(이정호·이수진·홍민영), 『나주 화정리 마산3호분』(2009) 등을 참조하였다. 7) 이정호, 「대형옹관의 제작과 가마에 대한 검토」(제1회 고대옹관연구 학술대회, 『영산강유역 대형옹관 연구성과와 과제』,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2007), 24쪽. 글쓴이 고석규 목포대학교 前 총장, 사학과 명예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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