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 기행] 매화꽃이 피면, 감태지가 익어간다 감태 게시기간 : 2023-03-08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3-03-02 10:26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맛 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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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태가 녹진하게 숙성되면 영감님이 참 좋아한다. 그래서 시골에서 밥장사를 하는 그녀는 그 감태를 ‘영감감태’라 이름을 붙였다. 영감님 밥상에 올려기에 붙여진 이름이지만, 그 맛을 아는 단골들이 가끔씩 입맛을 다신다. 어머니의 손맛이 길들여진 자식들도 그러리라. 지금 먹지 않으면 이젠 내년 찬바람이 이는 겨울철에 구경을 할 수 있다. 마지막 감태를 고흥 녹동에서 얻어왔다. 한 덩어리는 직접 감태지를 담가서, 한 덩어리는 세척해 상태로 가져왔다. 적어도 3월 중순까지는 감태 맛을 볼 수 있으리라. 전라도 갯밭에서 자라는 감태다. 여기에 김치의 전라도말 ‘지’가 더해져 ‘감태지’가 탄생했다. 쌉사름하고 뒷만은 달콤한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이름을 감태(甘苔)라 했을까. ‘감태’는 녹조식물 갈파래과 해조류로 ‘가시파래’이다. 갯벌이 발달하고 조차가 큰 서남해안 갯벌에 많이 자란다. 특히 오염되지 않는 민물이 들어오는 내만이나 강어귀에서 잘 자란다. 가는 통줄기로 이어지면서 짧게는 30센티미터 내외에서 길게는 수 미터까지 자란다. 겨울에 갯벌이나 나뭇가지나 양식시설에 붙어 자라며, 봄이면 포자를 방출하고 날씨가 따뜻하면 녹아서 사라진다. 그리고 포자는 가을에 생식이 이루어져 겨울에 뻘밭에 붙어 자란다. 갯벌이 발달한 신안, 무안, 고흥, 장흥, 완도 등 서남해안이 주산지이며, 서산과 태안 등 서해에서도 볼 수 있다. 자연산에 의존했지만 최근에는 양식도 이루어지고 있다. 주민들은 감태라고 부른다.
* 임금님 수라상에 오른 감태, 궐밖에서는 먹기 힘들어 옛문헌에 감태(甘苔)라는 이름이 명확하게 가시파래를 지칭하지 분명치 않다. 자산어보에는 감태와 상사태를 감태로 동정하기도 한다. 또 해태를 파래로 해석하기도 해서 오늘날 다양한 해초류를 옛문헌과 일치시키는 일은 쉽지 않다. 옛문헌에 나오는 감태(甘苔)를 살펴보자. ‘용재총화’ 제8권에 보면, ‘태(苔)는 남해에서 나는 것을 감태(甘苔)라하고, 감태와 비슷하나 조금 짧은 것을 매산(莓山)이라 하는데 구워서 먹는다. 친구가 찾아와 임금만 드시는 상에 올리는 것으로 궐 밖 사람이 맛볼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또‘경세유표’ 제14권의 ‘균역사목추의’ ‘곽세편’의 호남 부분에 감태가 아래와 같이 언급되어 있다. 호남의 곽전(藿田)과 태전(苔田)은 혹 생기기도 혹 폐지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몇 파(把) 몇 속(束)으로써 그 세액을 정할 수 없으니, 우선 예전 세액에 따라 참작해서 재감(裁減)한다. 생각건대, 곽(藿)이라는 것은 해대(海帶)이고(방언으로 미역) 태(苔)라는 것은 해태(海苔)인데, 혹 감곽(甘藿)ㆍ감태(甘苔)라 일컫기도 한다. 태는 또 종류가 많아서 자태(紫苔 : 속명은 海衣이고 방언으로는 김이라 함)ㆍ청태(靑苔)가 있어 대동소이한 것이 5~6종이나 있다.
옛날에는 양반들이 길을 나설 때 먹을거리로 가져가는 요긴한 식재료였던 모양이다. ‘덕촌집’ 제10권의 ‘비장편’에, ‘점심은 반드시 백모(白茅)를 깔고 밥을 놓고, 감장(甘醬)와 감태(甘苔)은 유지에 따로 쌌다’고 했다. 그리고 ‘밥보다 몇 배 더 무거운 유기그릇을 가지고 다니는 것은 허위이고, 빈 그릇을 지고 가는 것은 더 허위라’고 했다. 그러니까 왕의 수라상에 오르고, 양반의 길동무에도 함께 한 것이 감태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감태를 토산으로 기록 군현이 영광군, 함평현, 무안현, 진도군, 강진현, 해남현, 광양현, 흥양현 등이다. ‘만기요람’에도 감태는 ‘호남에서 나는 데 함평, 무안, 나주에서 나는 것이 썩 맛이 좋아 엿처럼 달다’고 했다. 자산어보에는 파래 중 저태(菹苔), 갱태(羹苔), 상사태(常思苔)등으로 구분했다. 한자를 풀어 보면 저태는 김치를 담아 먹는 파래, 갱태는 국을 끓이는 파래이며 상사태는 파래 중에 으뜸으로 꼽았다. 이들 명칭을 명확하게 구분할 수 없다.
* 오늘이 일곱물인께, 모두 갯밭으로 나올쇼 완도군 고금면 세동 마을은 매년 구정을 전후한 보름사리에 마을주민들이 모여서 감태를 맨다. 전형적인 맨손어업이며, 마을어업이다. 감태철인 겨울에 보통 40여 명이 모여서 수차례 감태를 맨다. 감태 매는 날이 정해지면 마을방송으로 일시와 때를 알린다. 이 날이 감태 개를 트는 날이다. 감태를 채취하는 것을 ‘맨다’고 하고, 갯밭을 여는 것을 ‘개 튼다’고 표현한다. 이때는 마을법에 따라 한 집에서 두 명씩 참여해야 한다. 참여하지 않을 때는 벌금이 부과되기도 하며, 대신에 참여한 사람에게는 감태를 판매해 마을공동기금을 제하고 나눈다. 이와 달리 마을주민들이면 감태철에 자유롭게 채취하는 곳도 있다. 무안군 망운면이나 해제면 등의 어촌마을이다. 감태의 작황을 보고 물이 빠지면 삼삼오오 주민들이 모여서 감태를 채취한다. 참가자 제한이 없고, 능력껏 채취해 개인이 갖는다. 고흥군 영남면이나 녹동읍 일대 갯벌에서도 비슷하게 채취한다. 어느 쪽이든 물때에 맞추는 것은 물론이고 칼바람을 여겨내고 허리를 굽히고 감태를 매야 한다. 날이 너무 추우면 감태가 자라는 것이 더디고, 너무 더우면 모두 사라지니 오가며 갯벌을 살펴야 하는 일도 누군가의 몫이다. 너무 많이 자라면 부드러운 부분만 택해야 하며, ‘쩍’이라 부르는 패류껍질이나 돌 부스러기 등이 없는 곳에 자라는 감태가 좋다. 밥상에 올리려면 채취하는 일보다 세척하고 쩍을 골라내는 일이 더 수고스럽다. 보통 서식지에서 두세 번 씻고, 집으로 옮겨와 몇 차례 더 세척한다. 그리고 물을 모두 빼낸 후에 뒤적거리며 쩍이나 돌을 골라내야 한다. 채취하는 것도, 세척하는 일도, 쩍을 골라내는 수고로움도 모두 허리를 굽히고 손으로 해야 하는 일이다. 게다가 물때에 맞춰야 하기에 밥때는 뒷전이다. 점심을 건너 뛰기 일쑤다. 그래도 마다하지 않는 것은 겨울 농한기에 그 벌이가 솔찬하기 때문이다. 아니면 그 맛을 잊지 못하고 찾는 자식들을 생각해서다. 감태를 매는 날이면 물때에 맞춰야 하기에 밥때를 맞출 수 없다. 이럴 때는 빵과 우유를 챙긴다. 김 양식을 하거나 가공공장이 있는 갯벌을 감태가 잘 자라지 않는다. 감태는 ‘바다 폴리페놀(sea polyphenol)’이 풍부하다. 이를 줄여서 ‘씨놀(seanol)’이라 부른다.이 성분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발병을 억제하는 효과 있다고 알려지면서 감태가 귀한 대접을 받기도 했다.
* 영감감태에서 아들감태까지 영감은 숙성한 감태지를 좋아하지만 아들은 막 무쳐 낸 것을 좋아한다. 영감감태는 미리 담아 숙성을 시켜 놓고, 아들에게 보낼 감태는 새로 담았다. 감태지가 있어야 밥이 넘어간다는 영감은 삭은 물김치 같은 감태를 좋아한다. 아들은 물이 많이 생기기 전에 감태향이 진한 생감태김치를 좋아한다. 모두 어머니가 손맛에 익숙해진 입맛이라 겨울철이면 연례행사처럼 감태김치를 담아 보낸다. 전라도 대부분 지역에서 감태지를 먹지만 겨울철 일상으로 밥상에 올리는 곳은 고흥과 무안 등이다. 어느 식당을 가도 감태지가 나온다. 만약 밥상에 감태지가 없다면 달라고 하면 틀림없이 내올 것이다. 그만큼 인근 갯벌이 좋고 깨끗하다는 징표다. 읍내 상설시장이나 오일시장에 어김없이 감태를 파는 집을 만날 수 있다. 감태김치는 장, 참기름, 다진 마늘, 다진 고추를 넣고 무친 다음 통깨를 뿌리면 된다. 사흘 정도 숙성을 시킨 다음 먹는다. 감태무침은 감태에 무를 채 썰어 양념을 해서 새콤달콤하게 무친다. 싱싱한 굴을 넣기도 한다. 숙성된 감태는 더욱 부드러워지고, 개운하면서 단맛이 입안에 남는다. 이외에도 감태장아찌, 감태전, 감태김 등도 있다. 매립과 간척, 양식장 확대 개발, 생활폐수와 공장폐수 갯벌유입 등으로 자연산 감태 서식지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최근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된 ‘한국의 갯벌’도 겨울철이면 대부분 감태밭으로 변하는 곳이다. 봄에는 바지락, 여름에는 낙지, 겨울이면 감태를 선물하는 어민들의 갯밭이다. 국제슬로푸드협회는 감태를 지키고 서식지와 생산자를 보호하기 위해 ‘감태’를 소멸위기의 음식문화유산을 보전하고 육성하는 ‘맛의 방주’로 지정하기도 했다.
숙성된 감태지 막 담근 감태지 *용재총화, 조선중기 문신 성현(成俔, 1439 ~ 1504)이 지은 잡록집, 악학궤범 편찬 *덕촌집, 영암출신으로 조선후기 문신 양득중(梁得中, 1665~1742)의 시문집, 양득중은 학포 양팽손의 6세손임. 글쓴이 김준 광주전남연구원 책임연구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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