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그림 이야기] 내가 사는 곳에 좋은 밭과 넓은 집이 있으니 게시기간 : 2021-07-14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1-07-12 13:48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옛 그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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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농기념관에 소장된 허건의 <낙지론>이라는 그림이다. 「낙지론」은 후한(後漢)시대의 학자이자 고사(高士)였던 중장통(仲長統, 179-220)이 쓴 문장으로, 허건은 이 글을 화제시로 써놓고 그림을 그렸다. 내가 사는 곳에 좋은 밭과 넓은 집이 있으니 산을 등지고 냇물을 굽어보며 도랑과 연못이 둘러 있다. 주위는 대나무와 나무들이 둘러싸고 앞에는 타작마당과 채소밭이 있으며 뒤쪽에는 과수들이 심어져 있다. 걷거나 건너는 것을 대신해 배와 수레가 있고 수고를 대신해 줄 하인들이 있으며 부모님을 봉양할 맛있는 음식이 있고 처와 자식을 수고롭게 할 일이 없다. 좋은 벗들이 모이면 술과 안주를 차려 즐기고 좋은 때나 좋은 날이면 양과 돼지를 삶아 조상에 바친다. 동산 위를 거닐기도 하고 숲에서 놀이를 즐기기도 한다. 맑은 물에 몸을 씻고 시원한 바람을 쏘이며 헤엄치는 잉어를 낚고 높이 나는 기러기를 활로 쏘아 잡는다. 기우제 제단 아래서 바람을 쐬고 시를 읊으며 집으로 돌아온다. 방안에선 정신을 가다듬고 노자의 현허(玄虛)를 생각하고 조화의 정기를 호흡하며 지인(至人)의 경지를 구한다. 깨달은 몇몇 사람과 도를 논하고 책을 강론하며 고금의 역사와 인물을 평한다. 「남풍가」의 우아한 곡조를 연주하고 청음(淸音)과 상음(商音)의 오묘한 가락을 연주하며, 한 세상을 유유히 살며 천지 만상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시대의 책임을 맡지 않고 타고난 생명을 길이 보존한다. 이와 같이 한다면 하늘을 넘어 우주 밖으로 나갈 수 있을 것이니 어찌 제왕의 문으로 들어가는 것을 부러워하랴!
운림산방 주인 남농 樂誌論 使居有良田廣宅 背山臨流 溝池環迎 竹木周布 場圃築前 果園樹後 舟車足以代步涉之難 使令足以息四體之役 養親有兼珍之膳 妻孥無苦身之勞 良朋萃止則陳酒肴以娛之 嘉時吉日則烹膏豚以奉之 躇躕畦苑 遊戲平林 濯清水 追凉風 釣遊鯉 弋高鴻 風乎舞雩之下 碟歸高堂之上 安神閨房 思老氏之玄虛 呼吸精和 求至人之彷佛 與達者數子 論道講書 俯仰二儀 錯綜人物 彈南風之雅操 發清商之妙曲 逍遙一世之上 窪睨地之間 不受當時之責 永保性命之期 如是可以淩霄漢出宇宙之外矣 豈羨乎入帝王之門哉. 雲林山房 主人 南農 은일한 삶에 대한 동경 중장통의 「낙지론」은 자연 속에서 여유롭고 편안한 삶을 즐기는 것을 찬미하는 글이다. 낙지(樂志)란 ‘자신의 뜻대로 즐거워한다’는 뜻으로 마지막에 ‘어찌 제왕의 문에 듦을 부러워하랴(豈羨夫入帝王之門哉)?’ 라는 대목에서 세속적 출세보다는 은일한 삶에 대한 동경과 개인의 평안, 행복이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드러낸다. 이 글을 쓴 중장통은 중국 후한 말의 정치가이다. 학문을 좋아하였으며 세상일에 신경을 쓰지 않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41세에 세상을 떠났지만 젊은 시절에 이미 인생을 일찍 달관했기 때문인지 「낙지론」을 읽어보면 유유자적 즐기며 욕심에 연연하지 않고 마음 가는 대로 살아가는 것을 노래한다.
「낙지론」을 주제로 그린 그림 중 가장 유명한 그림은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 1745-1806)의 <삼공불환도(三公不換圖)>이다(그림 2)*. 이 그림은 1801년 12월 순조가 수두에 걸렸다가 쾌차하자 이를 기념하기 위해 제작되었다. <삼공불환도>에는 간재 홍의영(艮齋 洪儀泳, 1750-1815)이 송대(宋代)의 시인 대복고(戴復古)의 「조대(釣臺)」에 나오는 구절을 제목으로 하고 중장통의 「낙지론」으로 제발을 썼다. 삼공불환(三公不換)은 전원의 즐거움을 삼공(三公)의 높은 벼슬과 바꾸지 않겠다는 의미이다. 김홍도가 그려낸 이 그림은 「낙지론」의 내용을 화폭에 충실하게 구현해내고 있다. * 조지윤, 「단원 김홍도 筆〈三公不換圖〉연구-1800년 이후 김홍도 회화의 변화와 간재 홍의영」, 『미술사학연구』275·276호(한국미술사학회, 2012), pp. 149-175.
<삼공불환도>는 4m가 넘는 큰 병풍에 그려진 그림이다. 큰 화면에는 강을 앞에 두고 산자락에 위치한 넓은 저택과 논밭 등 여러 가지 정경이 그려져 있다. 저택에는 손님을 맞아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평상에 누워 있는 선비, 베를 짜고 물레를 돌리는 아낙, 집안 한 켠에서 그네를 타는 아이들과 누각에 앉아 바깥 경치를 구경하는 선비의 모습이 보인다. 마당에는 사슴, 학, 닭, 개가 노닐고 연못에는 오리가 한가롭게 떠다닌다. 담 너머 집 밖의 너른 논밭에는 열심히 밭을 매는 농부와 낚시 중인 이가 있다. 멀리 물가의 풍경까지 김홍도는 전원생활의 한가로움과 정취를 화면 가득 담아내었다. 「낙지론」에 담긴 선비의 생활을 산수화와 풍속화가 적절하게 어우러진 전원생활의 모습으로 표현한 것이다.
다도해를 닮은 남농산수 허건은 김홍도의 <삼공불환도>와는 다르게 풍속적 장면 없이 산수화로서 「낙지론」을 그려냈다. <삼공불환도>에서 보이는 선비의 일상이나 집안의 정경 등 풍속적 장면이 나타나지 않는다. 아예 처음부터 낙지론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려는 의도가 없어 보인다. 다만 평화롭고 고즈넉한 풍경뿐이다.
<낙지론>은 옆으로 긴 형태의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구도를 보여준다. 한쪽에는 근경을, 다른 한쪽에는 원경을 두고 그 사이를 강이나 바다가 가로지른다. 근경 언덕에 소나무와 잡목을 그리고, 그 뒤로 커다란 주산(主山)을 중앙에 두었다. 화면 오른쪽으로는 섬들 사이를 유유히 항해하는 돛단배 몇 척이 저 멀리 이어지는 원경으로 시선을 돌리게 한다. 비탈진 야트막한 언덕에 소나무와 잡목, 몇 채의 가옥을 배치하는 구도는 남농 산수의 전형이다. 갈필을 이용하여 주산과 잡목을 처리한 표현이 두드러지는데, 군데군데 배치된 나무와 수풀의 처리에서 빠른 붓놀림을 느낄 수 있다. 거칠고 빠른 붓질을 반복한 독필(禿筆)은 허건의 개성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독필(禿筆)은 오래 사용하여 붓끝이 닳아서 무뎌진 붓으로 그리는 기법이다. 끝이 갈라져서 거칠고 빠른 효과를 표현하는데 사용한다.
허건이 꿈꾸는 이상적인 자연은 멀리 있거나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가 살고 있는 남도의 아름다움이었다. 진도출신으로 18세 때부터 목포에 정착한 이래 그곳을 떠나지 않은 채 작품 활동을 한 허건은 자신이 살고 있던 지역에 대한 애정을 담아 작품을 제작하였다. 상상의 산수인데 마치 유달산과 목포 앞바다의 실경을 보는 듯하다. 그렇기 때문에 <낙지론>에 그려진 대상은 더 이상 관념적이지 않은, 어딘가 있을 법한 남도의 풍광인 것이다. 허건이 생각하는, 또는 그려낸 낙지론의 내용은 자신의 고향에 대한 여유로움과 평안함이 아니었을까. 허건의 개성적 회화세계, 특히 산수화의 형식미는 1950년대 중후반 이후 완성되었다. ‘운림산방주인(雲林山房主人)’이라는 아호도 이때부터 쓰기 시작했다. 전국 각지를 여행다니며 주변의 일상적인 농촌풍경을 비롯해 심산유곡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소재를 취하여 실경을 사생한 그의 산수화에는 현실에 대한 애착이 짙게 나타난다. 이 무렵 허건의 화풍은 그 전에 그린 일본화풍이나 고답적인 화보풍의 산수화와는 다른, 그가 매일 보는 주변의 풍경과 일상에서 볼 수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다룬 것으로 고즈넉하면서도 아늑한 정취를 자아낸다.
허건은 저서인 『남종회화사(南宗繪畵史)』에서 자신의 화풍을 ‘신남화(新南畵)’라 칭하고 자신만의 개성적인 신남화풍을 찾으려 하였다. 내가 추구할 그림의 주체는 조선의 풍토에 맞는 신남화를 개척하려고 고심참담하였으나 지금도 성가(成家)를 못함은 부끄럽다. 그래서 조선의 산천, 조선의 전원정서를 그려보고 조선의 인물을 그려보려고 굳게 결심하고 나섰던 것이다.*
허건이 추구한 신남화는 관념적 남종화에서 한 걸음 나아가 실경을 바탕으로 우리 주변의 자연을 사실적으로 담아내려 한, 즉 한국의 정서를 바탕으로 순수한 우리의 정경을 그리는 것이었지 않을까. * 허건,『남종회화사』(서문당, 1994), p. 309.
‘남쪽에서 농사짓는 이’ 남농 허건 허건은 할아버지 소치 허련(小癡 許鍊, 1809-1892)과 아버지 미산 허형(米山 許灐, 1862-1938)의 영향 아래 전통화의 계승과 더불어 새로운 화풍을 수용해 목포화단의 축을 이루었다고 평가된다. 화가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그림에 재능이 있었던 허건은 의재 허백련의 스승이었던 무정 정만조로부터 ‘남쪽에서 농사짓는 이’, 즉 ‘남농’이라는 아호를 받았다. 1930년 조선미술전람회(약칭 선전) 동양화부에 입선하여 화단에 이름을 알린 허건은 1944년에는 <목포일우>로 선전 총독상을 수상했다. 해방 이듬해(1946년)는 ‘남화연구원(南畵硏究院)’을 열어 후진을 양성했다. 아산 조방원(趙邦元, 1926-2014), 청당 김명제(金明濟, 1922-1992), 도촌 신영복(稻村 辛永卜, 1933-2013) 등 걸출한 화가들이 그의 문하에서 배출되었다. 허건은 제자들에게 ‘내 그림을 본뜨지 말고 개성 있는 자신의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강조하였다고 하는데, 제자들 역시 허건의 필법과는 다른 각자의 개성을 보여주는 중견작가로 성장하였다. 또한 각자 제자들을 양성하면서 화단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이와 함께 1957년 창립회원으로 참여한 ‘백양회’를 비롯한 단체전과 광주․전주․서울․제주 등 경향 각지에서 개인전 혹은 초대전을 통하여 전시활동도 왕성하게 하였다.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에 추천작가․초대작가․심사위원을 역임했으며 말년에는 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전라남도 문화상(1956), 목포문화상(1960), 5·16민족상(1977) 등 많은 상도 수상하였다. 허건은 전통산수를 비롯한 고사인물, 화조, 영모, 풍속 등 다양한 소재를 다루었다. 일본에서 유학한 동생 허림의 영향으로 채색 위주의 분위기 묘사에 뛰어난 작품을 제작하였으며, 광복 후에는 전통적인 산수화의 맛과 현실적 시각을 조화시키는 실경산수를 비롯해 소나무 그림들을 남겼다.
허건이 그려낸 <낙지론>은 어쩌면 너무나도 평범한 전원의 일상일 수도 있다. 비록 이상적인 선비의 은일하고 여유로운 삶이 아닐지라도, 허건의 그림에는 나지막한 민가와 배를 저어가는 뱃사공의 일화가 담겨있다. 우리네 정겨운 삶터를 낙지론에 빌려 이상화시켜낸 셈이다. 참고문헌 및 인용출처 <낙지론>의 화제시의 원문과 번역은 국립현대미술관, 『남농 허건』(결출판사, 2008), pp. 참조
광주시립미술관․ 부국문화재단,『탄생 100주년 기념 남농 허건』전, 2008. 허건, 『남종회화사』, 서문당, 1994. 이태호, 「육자배기 자락이 너울대는 이상향-진도 許文과 南農 許楗의 산수화」, 『탄생 100주년 기념 남농 허건』(광주시립미술관․ 부국문화재단, 2008), pp. 84-95. 조지윤, 「단원 김홍도 筆〈三公不換圖〉연구-1800년 이후 김홍도 회화의 변화와 간재 홍의영」, 『미술사학연구』275·276호(한국미술사학회, 2012), pp. 149-175. 글쓴이 김소영 전남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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