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초대석] 사제 간에 시로 쌓은 끈끈한 정_최산두와 유희춘의 수답시 게시기간 : 2021-07-21 07:00부터 2030-12-17 21:21까지 등록일 : 2021-07-19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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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시초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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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산두와 유희춘이 주고받은 수답시(酬答詩) 위의 두 작품은 스승 최산두(1483〜1536)와 제자 유희춘(柳希春, 1513〜1577)이 주고받은 수답시이다. 시 제목에서 말한 ‘유미암’의 ‘미암(眉巖)’은 유희춘의 호로, 내용 이해를 돕기 위해 작품 순서대로 다시 한 번 정리해본다. ① 백발의 문장가가 술에 취해 노래를 부르게 된 까닭은 잔치 자리에서 술잔을 자주 들었기 때문이다. 친구와의 깊은 정이 아직까지 남아 이어지고 있는 이때에 석양 언덕에는 꽃이 지고 새가 울음을 우는구나.
② 잔치가 베풀어진 이 자리에 시를 읊는 사람도 있고 노래를 부르는 사람 있나니, 맞이하고 보내는 마음과 회포는 밤낮으로 깊습니다. 동쪽과 서쪽으로 나뉘어 가는 소매를 붙잡지 못하니, 훗날 꽃이 피는 언덕에서 다시 만나 즐겁게 놀기를 바랍니다. 작품 ①은 스승 최산두가 지은 것이고, ②는 제자 유희춘이 지은 것이다. 두 작품을 총괄하여 읽어보면, 이별을 하는 상황에서 술잔치를 벌이고 있으며, 시를 통해 자신이 말하고 싶은 것을 전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스승 최산두는 우선 자신을 가리켜 ‘백발의 문장가’라고 하였다. 자신이 술에 취하였고, 친구와 깊은 정이 아직까지 남아있다는 것도 알렸다. 전구 원문의 ‘운수(雲樹)’는 중국 당나라 때 두보(杜甫)가 지은 「봄에 이백을 그리며〔春日憶李白〕」의 시 구절 “위북에는 봄 하늘 아래 나무요, 강동엔 저물녘의 구름이로다.〔渭北春天樹 江東日暮雲〕”에서 유래하였다. 두보가 일찍이 위북(渭北)에 있을 때 이백은 강동(江東)에 있었다. 봄날이 되어 두보가 이백을 그리워하며 시를 지었는데, 자신이 살고 있는 위북의 상황과 함께 이백이 살고 있는 강동의 상황을 말하였다. 각 구의 마지막 한자 ‘수(樹)’와 ‘운(雲)’ 자를 따서 ‘운수’라는 시어가 만들어졌는데, 훗날 멀리 있는 친구를 못내 그리워한다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최산두와 유희춘은 30년의 나이 차이가 나는 사제지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산두는 친구라는 의미를 가진 ‘운수’라는 시어를 사용했는데, 이는 아마도 다정함을 나타내기 위해 그리했을 것이다. 스승의 시에 대해 제자 유희춘도 이별의 아쉬움을 드러내었는데, 마지막 구절에서 훗날 꽃 피는 언덕에서 만나 다시 즐겁게 놀자고 약속을 하였다. 사실 이 두 작품을 지은 시기를 분명히 알 수 없다. 또한 두 사람이 잠시 동안 이별한 것인지, 아니면 오랫동안 이별한 것인지도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스승 최산두는 살던 곳에 그대로 남아있고, 유희춘만 길을 떠나게 되었다는 점이다. 스승은 남고, 제자는 떠나는 자리에서 먼 훗날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했는데, 과연 두 사람은 꽃이 피는 언덕에서 다시 만나 술자리를 베풀었을 것인가? 의문을 품어본다. 2. 최산두의 동복 유배, 그리고 김인후ㆍ유희춘과의 만남 최산두의 자는 경앙(景仰)이요, 호는 신재(新齋) 또는 나복산인(蘿葍山人)이며, 본관은 광양(光陽)이다. 8세 때 벌써 「영우두(詠牛頭)」라는 시를 지어 문학적 재능을 뽐냈으며, 18세 때 당시 순천으로 유배 온 김굉필(金宏弼)을 찾아가 뵙고 공부하였다. 김굉필은 1498년에 일어난 무오사화 당시 평안도 희천(熙川)으로 유배되었다가 2년 뒤에 전라도 순천(順天)으로 유배지가 옮겨졌는데, 당시 광양에 살던 최산두가 찾아갔던 것이다. 이어 19세(1501, 연산군7) 때 상경하여 조광조(趙光祖)ㆍ한충(韓忠)ㆍ김정(金淨)ㆍ김안국(金安國) 등과 함께 매일 서로 방문하여 경학을 강구하니 당시 사람들이 ‘낙중군자회(洛中君子會)’라고 불렀다. 그리고 22세 때 「강목부(綱目賦)」를 지어 진사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그런데 이해에 갑자사화가 일어나 스승 김굉필이 순천에서 서울로 이송되어 효수(梟首) 당하자 세속을 떠나 승주의 송광면에 소재한 천자암(天子菴)에 머물며 학문을 연마한다. 최산두는 이 천자암에서 9년 동안 머물다 31세 때 과거시험에 응시해 당당히 문과에 합격한다. 이후 32세 때 홍문관 저작을 시작으로 박사, 사간원 정언, 홍문관 부수찬, 사헌부 지평, 헌납, 홍문관 수찬, 예조 정랑, 의정부 사인 등 37세 때 11월 기묘사화가 일어나기 전까지 벼슬을 이어간다. 이 무렵부터 ‘호남삼걸두구춘(湖南三傑斗衢春)’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당시에 해남의 윤구(尹衢)ㆍ유성춘(柳成春) 등과 함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최산두는 기묘사화가 일어났을 당시에 의정부 사인이었다. 그리고 사화가 일어나 조광조 등이 유배를 갔을 당시만 해도 어떤 형벌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사화가 일어난 한 달 사이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사화를 주동한 사람들이 인사권 및 경찰권의 핵심을 다 장악했으며, 이어서 대사헌에 이항(李沆), 대사간에 이빈(李蘋)이 올랐다. 조광조가 주장한 모든 개혁들은 수포로 돌아갔고, 이에 더하여 조광조를 죽이자고 주장하였다. 또한 이항ㆍ이빈이 합계(合啓)하여 총 36명의 명단을 써서 죄 줄 것을 중종에게 요청하였다. 이러한 요청이 받아들여져 결국 최산두는 동복현(同福縣)에 유배를 가기에 이른다. 동복현은 지금의 전남 화순군 동복면ㆍ이서면ㆍ북면ㆍ남면 일대에 있던 옛 고을을 지칭한다. 기약 없는 유배가 시작된 것이다. 동복현으로 유배 간 최산두는 이듬해인 38세 12월에 부친상을 당한다. 이후 인근에 사는 유망한 인재들이 찾아오기 시작하는데, 거기에 특히 김인후(金麟厚, 1510~1560)와 유희춘이 있었다. 김인후의 이때 나이는 대략 18세였고, 유희춘은 15세였다. 이때 최산두는 미래가 밝은 두 사람을 잘 가르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을 것이다. 다음의 최산두 「행장」을 통해 최산두가 동복현에서 어떻게 생활했는지 알 수 있다. 선생은 평소 충효로써 자신의 임무를 삼고 정주학(程朱學)을 학문의 목적으로 삼았다. 법도가 엄정하여 움직이면 문득 법도에 맞아 갑자기 엎어진다 해도 오히려 『주역』을 강구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또 후진들을 보면 힘써 바른 길을 가르쳐 인도하였다. 이때에 하서(河西) 김문정(金文正)과 미암(眉巖) 유문절(柳文節)은 학문이 천인(天人)의 오묘함에 깊었으나 오히려 또한 바른 데로 나아가는 것을 그만두지 않았다. 흙집과 나물국을 먹으며 샅샅이 정밀히 분석해 추환(芻豢)의 즐거움으로 삼았다. 대체로 문사(文辭)와 유상(游賞)을 삼가 숭상한 것은 아니나 때때로 지팡이와 신발을 끌고 물염정(勿染亭)과 적벽(赤壁)의 사이를 소요했으니, 또한 옛사람이 이른바 ‘강호의 근심’이라는 것인가.
(최산두, 『신재집』 권3, 「행장」 일부) 최산두의 평소 삶의 자세와 함께 학문을 대하는 태도 등을 언급하였고, 후진들을 대하는 자세를 말하였다. ‘하서 김문정’은 김인후를, ‘미암 유문절’은 유희춘을 가리킨다. 즉, 김인후와 유희춘을 들면서 이들은 학문이 천인의 오묘함을 얻을 정도로 깊었으나 바른 데로 나아가기를 그만두지 않았다고 하였다. 아울러 소박한 삶을 살면서도 학문을 정밀히 분석해 마치 고기 음식을 먹는 것처럼 했다고 하였다. ‘추환’은 『맹자』에도 나오는 말로 각기 초식(草食) 가축과 잡식(雜食) 가축으로 맛있는 고기 음식을 뜻한다. 또한 글을 짓고, 놀면서 구경하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으나 가끔 지팡이와 신발을 끌고 물염정과 적벽 등을 소요했다고도 하였다. 물염정의 ‘물염’은 ‘속세에 물들지 말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성균관 전적 및 풍기 군수 등을 역임한 송정순(宋庭筍, 1506〜1544)이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적벽은 전남 화순군 이서면 장학리 동복천 동안에 위치한 절벽으로, 원래 석벽(石壁)이라 불렸는데, 최산두가 적벽이라 명명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 1533~1592)은 그의 나이 42세(1574, 선조7) 4월 20일부터 24일까지 무등산을 유람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 적벽도 다녀갔다. 고경명은 이때 다녀갔던 곳을 세세히 기록하여 「유서석록(遊瑞石錄)」이라는 4,800자의 방대한 유산기를 남겼는데, 적벽을 최산두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적었다. 사인 최신재가 중종 때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이 고을로 유배되었는데, 하루는 손님과 동반하여 달천(達川)에서부터 물의 원류를 더듬어 이 명승을 찾게 되었다. 이에 남방 사람들이 비로소 적벽을 알게 되어 시인 묵객의 노는 자취가 잇달게 되었으니 임석천(林石川)이 명(銘)을 짓고 김하서(金河西)가 시를 지어 드디어 남국의 명승지가 되었다. 아, 무창(武昌)의 적벽은 황강(黃岡) 만 리 밖에 있어 남만지대(南蠻地帶)의 안개가 자욱한 곳이었으나 다행히 소동파(蘇東坡)의 전후 적벽부에 힘입어 마침내 세상에 명성을 떨쳤다.
(고경명, 「유서석록」 중에서) 고경명은 중국 무창의 적벽은 소동파가 전후 적벽부를 지은 뒤로 널리 알려졌고, 화순의 적벽은 최산두로 인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고 말하였다. 적벽은 감추어진 공간이라서 사람들이 잘 알 수 없었는데, 최산두 덕분에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38세 12월에 동복현으로 유배 갔던 최산두. 그는 15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한 뒤 51세 때 사면되었으나 3년의 시간이 흐른 54세(1536, 중종31) 때 그만 생을 마감한다.
3. 스승 최산두에 대한 기억은 아련한데 최산두가 세상을 뜬 이듬해에 유희춘은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다음해에 별시 병과(丙科)에 합격한 뒤 권지 성균관학유를 시작으로 벼슬살이를 하였다. 그런데 1545년에 일어난 을사사화의 여파로 결국 함경도 종성(鍾城)으로 유배를 가는 신세가 된다. 스승이 동복현에서 기약 없이 유배 생활을 했던 것처럼 제자 유희춘도 종성에서 기약 없는 유배 생활을 보내게 되었다. 유희춘은 유배 생활 중에도 늘 어머니와 벗을 그리워하였다. 벗 중에서 김인후는 특별하였다. 최산두 밑에서 동문수학하였고, 사돈 사이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 그리운 마음은 시를 지어 수답함으로써 해소시켰는데, 그 대표 작품이 「하서 김인후의 시에 화답하다」 14수이다. 유희춘은 이 14수의 연작시를 통해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김인후에게 전달하였다. 그중 아홉 번째 작품에서 스승 최산두를 기억하는 내용을 담았다.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유희춘, 『미암집』 권1, 「화김하서운(和金河西韻)」 9) 유희춘은 특히, 최산두의 부(賦) 작품을 언급하였는데, 옛 사람들이 이르지 못할 경지에 이르렀다고 강조하였다. 또한 최산두가 마치 중국의 팽려 호수처럼 넓은 마음을 간직했다고 기억하였다. 곧, 유희춘에게 스승 최산두는 문장을 잘 지었으며, 넒은 마음을 간직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참고 자료> 『맹자』
고경명, 「유서석록」 두 보, 『두소릉시집』 유희춘, 『미암집』 최산두, 『신재집』 글쓴이 박명희 전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강의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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