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窓] 법성진에서 본 영광군수가 비변사에 올린 치계문, 1774년 게시기간 : 2021-07-27 11:00부터 2030-12-17 21:21까지 등록일 : 2021-07-26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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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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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 법성진 숲쟁이 - 명승
법성포단오제 - 국가무형문화재 영광 법성진성 - 전라남도 기념물 영광 법성 입암리 매향비 - 전라남도 기념물 영광 법성리 일본식여관 - 국가등록문화재 영광 법성. 다섯 종류의 지정 문화재가 있다. 일부는 중첩되기도 하지만 나름 의미가 있다. 문화경관 명승, 무형유산 단오제, 국방유적, 석각유산, 근대유산 등. 법성창과 법성진. 고려시대의 조창과 조선시대의 수군진. 그 오랜 역사속에서 다양한 문화유산이 전하고 지정문화재가 된 것이다. 법성진성을 국가지정문화재(사적)으로 승격지정하고자 지혜를 모아가고 있다. “법성진성”으로 한정하여 성곽유적으로 머무를 것이 아니라 “법성진”으로 공간과 시설을 포괄하는 방안으로 나가야 할 것이다. 지정문화재와 다르지만 오히려 더 알려진 문화자원이 있다. “영광 굴비”, 아니 “법성포 굴비”라 해야 하나. 석수어(石首魚)로 표기되는. 지정을 한다면 어느 관점이 중요할까. “굴비덕장과 굴비만들기”. 어로 전통지식으로 보면 무형문화재, 굴비 덕장의 여러 시설, 도구, 재료, 기록자료 등을 함께 본다면 어로민속생활사 유산으로 민속문화재, 조선초 태조실록, 신증동국여지승람 토산조 등에 나오니 그 오랜 역사의 현장 유산으로 치자면 기념물이다. 이에 대해서도 보다 진전된 논의가 있으리라 본다. 또 하나 아쉬운게 있다. 중요한 내용인데 지금은 실물을 볼 수 없으니. 조선후기의 기록자료이다. 고가의 벽지로 발라진 문서. 1774년 영광군수가 비변사에 올린 치계문 원본 문서. 그 사연으로 들어가 보자. 2016년 4월. 법성진 현지조사를 하던 전라남도 문화재전문위원(성대철, 위촉직)에게서 연락이 왔다. 다 무너져 가는 법성진내 고가인데 건물 상량 기록[겉상량]이 있어 헤아려 보니 1829년(道光 玖年)인데 일부 부재만 걸쳐져 있어 하늘이 훤히 보인다는 것. 그리고 또 한가지는 벽에 발라진 벽지에 한문이 많이 쓰여 있어 무슨 문서 같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 목조건축으로도 오래된 연대이지만 “벽짝”에 발라진 문서라는 말이 더 와 닿는다. “과로”에 “가고(家故)”의 후유증으로 병원 문턱을 나서던 터이지만, 호기심이 또 발동. 우선 사진을 받아 보았다. 어느 한 부분에서 1774년(乾隆 三十九年) 연기가 확인된다. 아니, 이러 문서로 도배를 하다니. 당시 조사는 법성진성 현황조사. 발견된 곳은 법성면 진내리 336번지 가옥. 오래된 건물이 있다 해 혹 관아 건물이지 않을까 해 찾아갔던 것. 집은 폐가가 된지 오래였는데 상량과 벽의 일분 문서를 확인. 경위를 듣고서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말을 듣지 않은 몸을 달래가며 현장으로 나섰다. 사진을 받아 본지 열흘 남짓. 말 그대로 폐가였다. 지붕은 다 없어지고 도리만 걸쳐져 있어 바로 하늘이었다. 키를 넘는 온갖 잡초에 “귀신” 나올 것 같고. 벽에 붙은 문서를 통째 잡아 다녀 벗겨 보았다. 땀과 먼지는 뒤범벅. 벽지와 함께 벽체의 흙벽 부스러기가 붙어서 떨어진다. 부피가 너무 커서 승용차에는 실을 수가 없었다. 공부길의 동지인 도서문화 전문가(김경옥교수)도 함께 하였다. 고문서팀도 있었고 군청에서도 왔었다. 사랑채 처럼 보이는 처마 밑에 우선 두고 시간을 봐가면서 어디로 옮기든지 조치하면 될 것 같았다. 차일 피일 하다가 시간이 흘렀고 결국에는 몇 달간 출근마저 못하고 말았다. 그런 사이 그 문서에 대해서는 생각도 못했고. 법성 진내리 고가의 벽지문서는 조선후기 관문서였다. 1774년 영광군수가 비변사에 올린 치계문. 이 고가의 상량기록[겉상량]은 “道光玖年 己丑 六月二十八日 辰時立柱 同日 申時上樑”이다. 1829년(순조 29)년에 해당한다. 목조 건조물로서 오래되었고 4칸 규모인 점도 여느 민가와는 비교되었다. 문서는 크게 성격과 연대, 작성 주체가 다른 두 가지 종류로 보인다. 하나는 영광군수가 비변사에 보고한 한인(漢人) 표도민(漂到民) 관련 기록이다. 영광군수가 주체로 보인다. 법성진 옛터에서 확인되는 것은, 당시 표도민을 법성진 공해에 머물게 하고 문정(問情)을 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침몰한 선박에서 건져 올린 쌀에 대한 매입 건으로 생각된다. <古法聖>이라 표기되어 있고 <朴興祿 水 二石二斗> 등 인명과 물량이 나열된 것으로 아마도 법성포진 첨사가 주체가 된 것으로 보인다.
표도민 기록은 <비변사등록> 등 관찬 기록에서 많이 확인 되지만, 현지의 원 자료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아마도 첫 사례일 듯싶다. 이 고가 문서는 “乾隆 三十九年 十二月 初 (六)日”의 연기가 있어 영조 50년(1774) 12월 6일에 영광 구수미에 표류한 한인(漢人) 관련해 보고된 치계임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이 시기 즉, 1774년(영조 50)에 영광 법성포로 한인 25명이 표착한 사실이 <비변사등록>에서 확인된다. 우선, 진내리 고가 벽체에 있는 고문서를 옮겨 보자.(사진 성대철, 정리 김희태, 김경옥, 고정서) ○○○○
京問官備局○○○ 全羅道靈光郡漂漢人 本月二十九日四更量馳到靈光郡 三十里地法聖鎭公廨三十日卽○○○○○○○○ 爲詳細問情則果是○戶行○○○駕○○ 乎等以同漂漢人姓名年紀居住○帶錢布○ 于○以備考覽爲乎旀其隨身雜物件記段○ 同故不爲○呈而問情酬酌之際○○○○ 乎則渠等○○容改坐曰俺等漂沒○ 命已是貴國之恩德況賜之依而賜之○○ ○○○○....... ○離發而○人○○○○○○○○ 爲臥乎事乾隆 三十九年 十二月 初 (六)○ 爲馳報事九水尾漂到彼人等○○ 纔已謄報事 그 내용은 전라도 영광 구수미(九水尾)에 표도한 한인(漢人)에 관한 내용이다. 본월(本月, 10월) 29일 사경(四更, 새벽 1시~3시)에 한인이 표도하여 영광군에서 30리 거리의 법성진 공해에 머무르게 하고 상세하게 물어서 신원을 파악했다. 성명, 나이, 거주지, 전포, 휴대물품 등을 기록하고 문정할 때는 편안하게 대했으며 그들은 표류에서 생명을 구해주고 옷을 내려 준데 대해 은혜에 감사해 했다. 12월 6일에 치보한다는 내용이다. 이 문서와 <비변사등록>을 비교하여 기록 순서대로 정리해 보자. 11월 19일에 <비변사등록>에서 처음 보인다. 영광 구수미 표도 한인 관련 첫 공식기록인 셈이다. 전라감사 서호수의 장계에 따라 비변사에서 육로로 돌려보내고 자문을 지어 보낼 것을 보고한다.[<비변사등록> 영조 50년(1774년) 11월 19일(음)] 그런데 진내리 고가 고문서를 통하여 10월 29일 새벽 25명이 표도하였음을 알 수 있다. 10월 30일에는 법성진 공해에 머물게 하고 인적사항 등을 상세히 확인한다. 12월 6일에는 영광군에서 비변사에 치계한다.[고가 고문서] 12월 8일에는 영의정 신회가 영광 표류인들이 육로로 서울에 온다하니 남별궁에 수용하여 문정하도록 논의한다. 그리고 이날 전라병사 이한태(李漢泰)가 영광 표도인 관련해 보고를 소홀히 했다하여 파직한다.[<비변사등록> 영조 50년(1774) 12월 08일(음)] 12월 18일에는 비변사 낭청과 역관이 문정한 내용을 정서(正書)하여 올리고 추운 날씨에 멀리 왔으니 하루 이틀 쉬게 한 뒤에 즉시 떠나게 하자고 보고를 한다.[<비변사등록> 영조 50년(1774년) 12월 18일(음)] 이후 송환된다. 이상, 법성 진내리 고가 고문서와 <비변사등록>을 통하여 알 수 있는 내용을 정리해 보자. 1. 1774년 10월 29일 영광 구수미에 표류하여 법성진 공해에 머물면서 샅샅이 문정(問情)을 하였다. 표류인들이 입을 옷가지는 우수영의 휴번목(休番木)으로 정하게 지어 주고 아침 저녁의 식사 제공도 각별히 신칙하여 조정에서 후미 구휼하는 뜻을 보이도록 한다. 영광군수, 전라병사, 전라관찰사는 비변사에 치계한다.
2. 법성진에서 문정한 역관이 영솔하여 육로로 서울로 올라가는데 12월 7일께 도착하고, 12월 18일까지 다시 문정을 하고 1~-2일 쉬게 한뒤 육로로 돌려 보내진다. 3. 표류한 한인들은 중국 산동성(山東省) 등주부(登州府) 복산현(福山縣)의 상인(商人)들이었다. 4. 표도인들은 모두 25명이고 최연소 21세, 최고령 59세이고 문자를 아는 자는 2인, 수수(水手, 舵工)는 1인이고 나머지는 매매인(賣買人)이었다. 5. 봉천부로 쌀을 사러 가는 길이었고 돈 1천 2백 70조(吊) 영(零)과 백포(白布) 26필 흑포(黑布) 4백 80필을 소지하였다. 1천 전이 1조이고 1백 전은 1백(白)이다. 6. 10월 23일 집을 떠나 28일 배에 올랐으며 영해부(寧海府) 소관 철산(鐵山)앞에 이르러 바람을 만나 10여일 표류하다 11월 9일 우리나라 역내에 정박하였다. 7. 법성포에 머물면서 역관 정사현(鄭思玄)이 문정한 내용과 비변사에서 문정한 내용은 별로 다르지 않았고, 정사현은 서울까지 영솔하였다. 8. 표류 사건이 발생하면 병사나 관찰사 장계를 올리는데, 전라병사 이한태(李漢泰)는 영광 표류인 장계와 비국에 보낸 보장(報狀)에서 물건의 성책(成冊)을 올려보낸다 하고서 올려보내지 않아 막중한 변보(邊報)를 소홀히 해 파직 당한다. 9. 서울에서는 남별궁(南別宮)에 수용하고 금군(禁軍) 1인과 좌·우포도청의 군관 각 1인씩을 따로 차정하여 위군(衛軍)과 포군(捕軍)을 거느리고 각별히 수비하게 하며 음식물을 제공하고 의복을 지어 주는 일 등도 각 해조(該曹) 로 하여금 전례대로 거행하게 하고 본사의 낭청 1인과 일을 잘 아는 역관 몇 사람도 차정하여 샅샅이 문정한다. 10. 육로로 가고자 하여 육로로 돌려보내며 각도(各道)에 분부해 차원(差員)을 서울로 올려보내게 한다. 서울에서 의주부(義州府)로 보내서 봉황성(鳳凰城)으로 보내되 급식과 쇄마(刷馬) 징발, 잡인(雜人) 엄금, 물건 쇄마 운반, 차원 영솔로 실종 방지, 한학(漢學) 역관 한 사람 배치, 자문도 승문에 시켜 미리 짓게 하여 재자관(齎咨官)의 행차를 기다리게 하는 등의 절차를 따른다. 영광 법성 진내리 고가에서 확인된 고문서는 일부 내용이지만, 표도민과 막중한 변사(邊事)에 대한 처리 절차를 알 수 있는 현지의 원본 자료로서 처음 확인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몇 달 뒤 다시 현장으로 나섰다. 발견된 뒤 얼마지 않아 보관했던 건물마저 무너지고 비에 씻겨버려 흔적마처 찾기 어려웠다. 그때 어떻게든 이동하여 보관하도록 했어야 했다. 이제 사진 한 장 남았다. “가고”의 트라우마로 출근도 못했는데 현장 유산에 신경쓸 겨를이 있었겠는가. 할 수도 있지만 “변명”이다. 문화유산은 그때 그때 잘 보존하고 관리해야 한다. 법성 고가 벽지로 발라진 1774년 변사의 치계문 원본. 그 중요성 만큼이나 상실감도 크다. 그 상실감이 또 다른 트라우마로 남을 것 같다. 참회의 글로 대신할수 있을까.
글쓴이 김희태 전라남도 문화재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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