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家別傳] 도선(道詵)과 고려 태조 왕건(王建) 게시기간 : 2021-08-04 07:00부터 2030-12-17 09:16까지 등록일 : 2021-07-30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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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家別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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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는 말 도선(道詵)은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탄생과 고려의 건국을 예견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왕건은 그의 십훈요(十訓要)에서 도선의 말에 따라 사찰을 건립했다고 함으로써 그가 도선과 긴밀한 관계가 있었음을 시사했다. 그러나 도선과 왕건이 연결되었다는 구체적인 기록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 도선과 함께 곡성 태안사를 근본도량으로 하는 동리산문계 승려인 윤다(允多)와 도선의 제자인 경보(慶甫)의 경우는 고려왕실과 밀접한 관련을 맺은 인물들이었다. 따라서 도선과 고려왕실과의 관계를 알아보는 방법의 하나로 고려왕실과 동리산문의 윤다·경보와의 관계를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이러한 시도는 도선과 고려왕실과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적지않은 도움이 될 것이다. 도선과 고려왕실의 관계에 대한 학계의 견해는 상반되게 나타난다. 일찍이 도선비문을 분석한 이마니시(今西龍)는 왕건은 도선을 알지 못했을 것이라는 주장을 폈다. 이어 그는 왕건과 도선의 관계를 언급한 십훈요 자체도 위작임을 논증하였다. 이에 반대하는 이병도·김상기·김성준을 비롯한 학자들은 십훈요의 사실성을 증명하는 가운데, 십훈요에서 언급한 왕건과 도선의 관계를 인정하였다. 2. 윤다(允多)·경보(慶甫)와 고려왕실 윤다는 동리산문 개창자인 혜철과 그의 법제자 ?여의 선법(禪法)을 계승한 동리산문 법맥의 계승자였다. 윤다는 혜철의 법손(法孫)이었다. 이러한 윤다에 대해서는 그의 비문이 전해지고 있다. 그 내용을 편의에 따라 나누어 살펴보기로 하자. ㄱ) 대사의 법휘는 윤다이다. 자는 법신으로 서울 사람이다. (중략) 법조 서당이 철(혜철)에게 전하였고, 철이 선사 여에게 전하였는데, 여가 우리 스님께 전하였으니, (대사는) 곧 서당의 증손이다. 대사는 법의 교화를 서당에게서 전해 받았으나 서쪽으로 가서 유학하는 수고는 하지 않았다.
ㄴ) ① 신성대왕(고려 태조)은 때를 탄 성스러운 임금이요, 드물게 있는 밝은 임금이었다. 나라를 평안히 하고 속세를 위무하는 큰 기미를 풍성하게 하고, 법을 수호하며 이치에 부합하는 신이한 기술에 통달하였는데, 여러 가지 정무를 하는 여가에 마음을 현문(玄門)에 두셨다. 즉위하기 전부터 대사의 명성을 익히 들었으므로 낭관(郎官)을 보내어 왕의 편지를 가지고 산에 들어가 청하였다. ② 태조가 물었다. “옛 스승(古師)께서 ‘마음이 곧 부처’라고 하셨는데, 이러한 마음은 어떤 것입니까? “만약 열반에 이른 자는 부처님의 마음에 머무르지 않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어떤 과정을 거쳐서 곧 그와 같은 데에 이르신 것입니까?” “부처님께서는 어떤 과정을 거친 것이 아닙니다. 마음 자체가 과정이 없는 것입니다.” “짐은 하늘의 도움을 받아 어지러움을 구하고 폭군을 베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백성들을 편안하게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오늘의 물음을 잊지 않으신다면 나라가 매우 다행일 것이며, 백성들에게도 지극히 다행일 것입니다.” “대사께서는 어떠한 덕행으로 중생을 교화하여 따르게 하셨습니까?” 신승(臣僧)은 스스로도 구제하지 못하였는데, 어찌 감히 다른 속박을 벗겨 주겠습니까?“ ③ 황주원(黃州院) 왕욱낭군(王旭郞君)이 맑은 기풍을 멀리서 우러러 짤막한 편지를 전하여 제자가 되기를 원하였고 스승을 따르기를 바랐다. ④ 내의령(內議令) 황보숭(皇甫崇)과 태상(太常) 충량(忠良)이 날마다 대사의 음식을 살피기를 마치 심부름꾼의 직분을 행하는 것과 같이 하니 대사가 편치 아니하였다. ㄷ) 어떤 사람은 칠정(七淨, 계울)을 받아 걸출하고, 어떤 사람은 십지(十地, 화엄)를 쌓아 중새을 제도한다. (이런 이들은) 옛부터 드물었고 지금도 귀한데, 두 가지 아름다움을 모두 갖춘 이가 바로 우리 대사이다. ㄹ) “옛말에 ‘마음을 오로지 하면 돌도 뚫을 수 있고, 뜻이 간절하면 샘도 솟게 할 수 있다’고 하였다. 도는 몸 밖에 있는 것이 아니며, 부처로 나아가는 것은 마음에 달렸다. 잘 익힌 자는 찰나에 깨닫고, 어리석은 자는 만겁토록 머물게 된다……. 네 자신을 잘 살피라. 나의 말에 있는 것이 아니다.”
ㄱ) 사료에서 보듯이 윤다(允多, 864-945)는 당나라 서당지장의 선법을 이은 혜철 - ?여- 윤다로 이어지는 사자상승(師資相承)의 법맥을 이은 선승이었다. 그는 동리산문의 개산조 혜철의 문하인 점에서 선승이면서도 풍수지리에도 밝았던 인물로 이해된다. 그도 도선처럼 당시 선승(禪僧)들의 관행이랄 수 있는 중국유학을 하지 않았던 승려였다. 동리산문의 정맥을 잇고 있는 승려는 혜철의 법제자인 ?여의 법인을 이은 윤다였다. 그는 경보와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지만, 그보다 먼저 왕건과 연결되었다. 그는 경문왕 4년(864)에 태어났으며 경사인(경주인)이었다.
그림 1. 곡성 태안사 광자대사 윤다 승탑비 어머니는 박씨였고, 조고 때까지는 그의 가문이 강성했다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윤다 대에 이르러 중앙귀족으로서의 세력기반을 잃고 낙향하여 지방 세력으로 성장하게 되었다고 보인다. 윤다는 8세에 출가하여 그 후 사방을 유력하다가 동리산문의 ?여대사의 문하에 나아가게 되었다. 이어 가야갑의 신수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다시 동리산으로 돌아온 윤다는 거기에서 산적을 교화하면서 주지직을 맡게 되었다. 대안사(현재의 태안사)에 주지직을 맡은지 얼마 안 되어 왕건과 연결되었다. 왕건은 낭관을 보내어 윤다를 개경으로 맞아들였다. 왕건과는 선문답을 하였다. 또 아직 왕위에 오르지 않은 황주원 왕욱낭군(뒤에 고려의 4대 임금 광종이 됨)의 돈독한 귀의를 받았다. 뒤에 대안사에 귀산할 때에도 내의령 황보충량이 그를 모시고 있었다. 이 때 고려왕실은 동리산문에 많은 토지와 노비를 내렸다. 대안사에 돌아온 윤다는 혜종 2년(945)에 입적하였다. 그의 나이 82세이고, 승랍은 66년이었다. 혜철을 비롯한 동리산문의 문도들은 대체로 신라조정에 대해 호의적인 세력과 연결되지 않았다. 오히려 신라에 적대적인 세력과 손을 잡고 있었다. 다음으로 경보에 대해 살펴보자. 경보(慶甫, 869-948)를 이해하는 데는 958년에 김정언이 찬한 비문이 참고가 된다. ㄱ) 법휘는 경보(慶甫)이고, 애칭은 광종(光宗)이며, 속성은 김씨인데, 영암군 구림 사람이다. 아버지는 익양(益良)인데 그 벼슬은 여섯째 관등 알찬이다.
오수(鰲峀)에 신령이 내려와 빛나는 여경을 기르고 계림에서 참사람이 태어나 백세의 방명에 올랐다. 어머니 박 아무개는 몸놀림이 깨끗하고 마음씨가 향기로워 음식 마련이며 집안꾸리기에 어긋남이 없었고 집안 화목이 살림 넉넉함에서 말미암았다. 868년(경문왕 8) 무자(戊子) 7월 초사흘 밤 꿈에 흰 쥐가 파랑 유리구슬 한 알을 물고 왔었다. 드디어 사람 말로 가로되, “이것은 바로 세상에 드문 진기한 물건이자 불문의 훌륭한 보배이니 품어서 모름지기 호념(護念)해라. 태어나면 반드시 빛이 빛나겠다” 했다. 인하여 태기가 있어 마음에 두고 재계했는데, 석가모니 출세 4월 스무날 태어났다. ㄴ) 부인산사(夫仁山寺)에 가서 머리 깎았으나 학문 숲에 깃듦으로해서 선산(禪山)을 즐기지 못했다. 빠른 발이 속절없이 선(禪)에 멈춰도 학문하는 마음에 아직도 집착되더니 영혼이 교감되는 저녁에 부처가 이마를 만지고 귀를 당기면서 이에 가사를 주어 가로되, “네가 이것을 입는 까닭은 몸을 지키어 수행함이로다. 게다가 이곳은 마음 공부하는 사람이 느긋하게 머무적거릴 곳이 아니다. 빨리 여기를 떠나감이 또한 마땅하지 않겠는가?” 대사가 곧 몸의 감각을 열고서 경계하여 생각하기를 ‘도리를 장차 행하려면 때를 잃어버릴 수 없다’하고 어두운 새벽에 일어나 앉아서 날 새기를 기다렸다가 행장을 꾸려서 철새처럼 훌쩍 떠났다. 이에 백계산에 나아가 도승(詵)화상(道乘和尙)을 뵙고 제자가 되기를 청했다. 보살도를 닦고 여래집에 들어가, 깊숙한 눈이 일찍이 열리고 이치를 아는 마음을 이미 깨달아 생각하기를 ‘지혜가 아니면 그 불법을 지킴이 없고, 계율이 아니고선 그 어긋남이 없다’고 했다. 나이 열여덟에 월유산 화엄사에서 구족계를 받았으니, 겨우살이덩굴이 눈을 터뜨림이고 부낭이 개울을 넘음이다. 계율의 향기를 더욱 장험하고 심지의 굳음을 매우 밝혔다. 무심코 비가 바야흐로 멎으니 나온 구름이 돌아감 같아 다시 백계산에 가서 큰 스승에게 하직하니 스승이 인하여 일러 가로되, “네 그 뜻을 빼앗을 수 없고 그 행동을 막을 수 없다. 네가 나를 보통 사람으로 살아도 어찌하지 못하는구나”하고 드디어 웃으면서 들어주었다. 그로부터 유행(遊行)에 널리 봄이 있었고, 배움에 정해진 스승이 없었으니 보령 성주사의 무염(無染)대사와 강릉 굴산사의 범일(梵日)대사를 두루 뵙고 얘깃거리를 가까스로 휘두르면 깊은 이치를 알아내었다. 생각하기를, ‘말을 캐고 옥을 찾음이 도리와는 먼 것인가. 행하면 곧 옳은 것이다’ 했다. 드디어 892년(진성왕 6) 임자 봄에 산을 나서매 더벅거리고 바다에 다가서매 펄렁거리니 당나라에 들어가려는 마음이 쏠리는 것을 어찌할까. 이에 바다 건너는 선주(船主) 나그네에게 여쭈니, 붙여 실리기를 허락하기에 기꺼이 동행하여 이미 주교(奏橋)을 지나고 한지(漢地)에 돌아 이르러서, 무심(無心)으로 길을 묻고 자취로 스승을 찾아 무주(撫州)의 소산(疎山)에 이르러 광인(匡仁) 화상을 뵈오니, 그이가 허락하여 가로되, “바로 그대가 신라의 용 아들인가.” 대사가 그윽이 드디어 비밀을 드러내어 말하니 이에 묻고서 승당(昇堂)하기를 허락했다. 인하여 방에 들어 바야흐로 목격(目擊)에 도움 받아 이미 심전(心傳)을 얻었다. 광인 어른이 크게 기뻐하면서 인하여 말해 가로되 “그 언젠가는 불법이 동전(東傳) 하리라는 얘기와 서학(西學)을 구하는 사람이 있으리라 했는데, 곧 나와 말하는 그대가 분명하오. 동쪽 사람으로서 눈짓 말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대뿐이겠소.” 손을 잡아 지혜의 등불을 전하고 마음으로 인하여 진리의 도장을 주었다. “그대는 그 반도산 옆에서 불일(佛日)을 도와서 다시 가시나무를 태워 버리고 바다 건너에 선(禪)의 세계를 이끌어 다시 넓힘이 기약할 만 하오.” 이로부터 스님의 참된 분에게는 반드시 나아가고 경지가 뛰어난 분에게는 꼭 찾아갔다. 강서(江西)의 노선(老善) 화상을 찾아뵈오니 화상이 이에 그 말을 듣고자 그 행동을 보고자 했다. 인하여 말해 가로되, “흰 구름이 나그네의 길을 막았구나.” 대답해 가로되, “스스로 하늘 길이 있거늘 흰 구름이 어찌 머무르겠습니까.” 화상이 대사(大師)로써 잽싸게 대답하되 “얽매이지 않으며 큰소리 하여 막힘없다” 하여 이에 그이를 보내면서 가로되, “이로움은 가는 데에 있으나 때가 된 뒤에 행동하도록 하시오.” 대사가 대붕새(大鵬)는 반드시 남명에서 변하고 두루미는 마땅히 동해로 돌아간다 하여 생각하기를 중국에서 유행(遊行)하기를 그만두고 고국으로 돌아가려 했는데 마침 돌아가는 배를 만나게 되어 동쪽으로 돌아왔다. 마침 귀국하는 배를 만나 고국에 돌아왔다. 천우 18년(921) 여름에 전주 임피군에 도달했다....주의 도통인 견훤 태보가 만민을 통융하고 있었다....대사의 인자한 얼굴을 우러러 뵙고는 첨앙하고 의지하는 뜻이 배나 더해졌다. 이에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우리 스승을 만남이 비록 늦었지만 제자됨을 어찌 늦추겠는가?”라고 하면서, 자리를 피하기를 진실히 하고, 띠에 적기를 독실하게 했다. 드디어 주내의 남쪽에 있는 남복선원에 머물 것을 청하자 대사가 말하기를, “새도 나무를 가려 깃들거늘, 제가 어찌 꼭지 달린 박과 외처럼 얽매여 머물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백계산 옥룡사는 돌아가신 스승께서 도를 즐기시던 맑은 거처로서 참선하기에 알맞은 곳이고, 구름 덮인 시내가 허공에 있는 듯 하여 경치가 가장 적당한 곳이었다. 드디어 태보에게 말하니 이를 허락하여 그 곳에 옮겨 거처하였다. 대사가 중국에서 구름처럼 유학하고 돌아와서 안개처럼 남산에 숨었는데도 근심함이 없이 빼어난 경관에서 진리를 펴 복을 천하에 쌓았다는 것을 들었다. 태조는 이에 맑은 바람을 바라보고 하얀 달을 멀리서 쳐다보듯, 서둘러 서신을 보내 왕경에 오도록 했다. 대사의 훌륭한 모습을 보고 귀로써 대사의 좋은 말씀을 듣고자 하였다. 비록 승려에게 귀의하는 예였으나, 바야흐로 부처를 모시는 예의와 같았다. 의공대왕(혜종)은 태조의 유풍을 받들고 그 뜻을 계승하였다. 마음을 기울여 정성을 다하고 법력을 기원함이 정성스러웠다. 문명대왕은.....서찰을 보내 대궐에 오기를 기다렸다. 경보는 광양 백계산의 도승의 법인을 이어 받았다. 도승은 도선일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경문왕 8년(868)에 태어났으며, 속성은 김씨이고 영암인이었다. 아버지는 육두품에 속하는 알찬 익량이고 어머니는 박씨이다. 경보의 가문도 본래 중앙귀족이었으나 낙향하여 지방호족이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경보는 이미 영암지방에서 호족세력을 형성하였던 도선과 같은 계통의 인물로 이해된다. 경보는 유학에 들 나이에 출가하여 대구 부인사에 거주하였다. 곧 이어 백계산의 도선의 제자가 되어 선을 닦았다. 헌강왕 11년(885) 18세 되던 해 월유산 화엄사에서 구족계를 받고, 다시 옥룡사로 돌아온 그는 배움에 일정한 스승이 없다고 하면서, 성주산문의 무염과 굴산문의 범일에게 나아가 현기를 찾으려 했다. 이에 만족하지 못한 경보는 진성왕 6년(892) 중국에 들어가 무주의 소산광인의 문하에 들었다가, 그의 법인을 받아 경명왕 5년(921)에 귀국하였다. 한편 경보가 귀국하던 시기(921년)는 서남해의 해상권이 왕건의 수중에 들어간 뒤였다. 그러한 가운데도 경보는 견훤의 도움을 받아 귀국하여 전주에 머물렀다. 그는 견훤이 제공한 남복선원(南福禪院)에 머물렀다가 다시 견훤의 배려로 광양의 옥룡사로 나아가 거기에서 주지가 되었다. 그는 옥룡사에 주석한 이후 왕건에게 연결되었다. 해변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리 잡은 옥룡사는 왕건의 수중에 들어가기 쉬었을 것이다. 경보는 후백제 멸망 뒤에 왕건과 대면하였다. 후삼국 통일전쟁을 하면서 왕건은 그의 명성을 전해 듣고 그를 불러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윤다와 경보는 후백제 지역의 고승이었다. 왕건이 이들을 후대한 것은 그들이 풍수지리설에 능한 때문이 아니었다. 고려 왕실은 이들을 우대하여 후백제의 백성을 회유하여 민심을 수습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3. 도선(道詵)과 고려 태조 왕건(王建)
도선이 왕씨 세력과 연결된 것은 그의 제자인 경보가 고려 태조 왕건과 연결되면서 부터일 것이다1). 동리산문의 개산조 혜철을 비롯한 동리산문의 문도들은 대체로 신라조정에 대해 호의적인 세력과 연결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적대적인 세력과 손잡았을 것이다.
그림 2. 광양 옥룡사지 선각국사 도선 부도전지 출토 부도편 문양 탁본 호남지역에서 신라왕실에 적대적인 세력은 뒤에 견훤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2). 도선의 풍수지리설이 견훤의 지지 하에 지리산을 중심으로 행해지고 있었다고 한다3). 도선의 제자인 경보가 견훤의 후원을 받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스승인 도선이 왕건과 연결되었을 까닭이 없다. 이것은 경보가 왕건과 연결된 이후에 생겨난 이야기이다4). 왕건 세력이 도선의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풍수지리설을, 송악을 중심으로 한 풍수지리설로 개편하려는 의도를 나타낸 것이다. 결국 도선의 제자인 경보를 포용함으로써 이 소망은 달성되었다5). 『高麗史』의 고려세계(高麗世系)에 주(註)로써 인용된 민지(閔漬)의 『편년강목(編年綱目)』에 의하면 도선이 두 번째로 송악에 와서 왕건에게 출사치진(出師置陣), 지리천시(地利天時)의 법(法)과 망질산천과(望秩山川)과 감통(感通)하고 보우(保佑)하는 이치를 가르쳐 주었다는 것이다. 도선이 직접 태조를 만났을 리는 없으나 간접적으로 왕건에게 전하여진 도선의 풍수지리설이 후삼국 통일전쟁에 있어 병법이나 군략적인 의미도 갖게 되었던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 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6). 왕건이 승려와 결합하는 의도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7). 그 하나는 호족세력 연합책의 일환이다. 또 하나는 교화적인 면으로 민심의 수합이다. 왕건과 승려의 결합은 고려 통일정책이었던 호족연합책의 일환이었으나, 통일이 가까워지면서 그것은 호족연합 뿐만 아니라 항복한 지역의 백성들을 교화하거나 내지는 민심을 수합하는 면까지 곁들이게 되었다8). 4. 나머지 말 곡성 태안사를 근본도량으로 하는 동리산문은 지리적 관계로 후백제 견훤과 결연되었다. 도선과 그의 제자 경보 역시 견훤과 연고되었다. 고려로 통일한 이후 후백제와 연결된 기록은 승려들 비문에 언급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반면에 고려왕실과 관련된 부분은 실제 보다 자세히 언급되었을 것이다. 후백제 멸망 후 고려왕들은 후백제의 견훤과 결연된 동리산문 계통의 승려들을 포섭하여 우대함으로써 민심을 수습하고자 했다. 또한 후백제 풍수지리설을 뒤엎고 개경 중심의 풍수지리설로 재편성 하고자 했다. 나주 점령(903년) 이후 왕건이 이 지역에서 세력을 부식하면서, 동리산문은 서서히 왕건의 세력권으로 들어갔다. 왕건과 연결되었을지라도 처음에 견훤과 깊이 연결되었다면, 동리산문이 고려 초에 계속해서 세력을 떨쳤을 것 같지 않다. 광종 때에 잠깐 활발하게 활동하지만, 이후 이들의 행적을 찾기 어렵다. 고려중기에 도선의 풍수지리설이 새롭게 부각되자, 동리산문에서 분립한 도선계 승려들의 활동이 오히려 뚜렷해졌다. 1) 이기백,「한국풍수지리설의 기원」, 『한국사시민강좌』 14, 일조각, 1994, 12쪽
2) 김두진,「동리산문의 성립과 그 사상」, 『신라하대 선종사상사 연구』, 일조각, 2007, 315쪽 3) 이기백, 앞의 논문 같은 쪽 4) 이기백, 앞의 논문 같은 쪽 5) 이기백, 앞의 논문 13-14쪽 6) 崔柄憲,「道詵의 生涯와 羅末麗初의 風水地理說-禪宗과 風水地理說의 관계를 중심으로-」, 『韓國史硏究』11, 1975, 145쪽) 7) 金杜珍,「王建의 僧侶結合과 그 意圖」(『韓國學論叢』4, 1981, 141쪽) 8) 金杜珍, 같은 논문, 152쪽 글쓴이 이계표 전라남도 문화재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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