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의 기억] 다시 보는 한글- 여암(旅菴) 신경준(申景濬)의 『훈민정음운해』를 중심으로(1) 게시기간 : 2021-08-11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1-08-09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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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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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소리를 기록할 수 있는 큰 법 정통(正統) 병인년(세종 28, 1446)에 우리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만들었는데, … 그 글자의 수는 많지 않으나 그 쓰임은 아주 넓으며, 글자를 쓰기가 아주 편하고 배우기도 아주 쉬우며, 천만 마디의 말도 자세하게 모두 형용한다. 부녀자나 어린 아이들이라도 모두 이 글자를 사용하여 그 사연을 전달하고 그 마음을 통할 수 있으니, 이는 옛 성인이 미처 탐구해내지 못하여 온 천하에 없던 것이다. 훈민정음은 우리나라를 은혜롭게 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천하 성음의 큰 법전[天下聲音大典]으로 삼을 만하다.1)
훈민정음을 “우리나라를 은혜롭게 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천하 성음의 큰 법전”이라고 했다.
한글은 “세계에서 가장 합리적인 문자”라고 외국인들도 극찬하고 있고 이미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도 지정(1997.10.01)되었기 때문에 요즘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면 그냥 당연하게 받아들일 법하다. 그런데 잘못된 상식 때문이긴 하지만, 이 말이 조선 후기 양반님네의 입에서 나왔다고 한다면 아마 믿지 못할 듯하다. 과연 누가 이런 말을 했을까? 『훈민정음운해(訓民正音韻解)』란 책을 쓴 여암 신경준(1712∼1781)이다. 그럼 신경준만 그랬을까? 다른 이들의 어록을 간단히 나열해 보자.2) 이로써 사람의 말과 짐승, 곤충의 소리[人之言語禽獸昆蟲之聲]까지 다 표기할 수 있다.(李思質(1705~1776), 『訓音宗編』「第九 訓音全文聲音起例」)
훈민정음은 나중에 나온 글자이지만, 그 글자의 모양이 간결하여 날마다 쓰기에 편하다. 우리나라에서 나라의 글자[國字]를 갖게 된 것은 이로부터 비롯되었다.(黃胤錫(1729~1791), 『理藪新編』, 卷二十 「韻學本源」) 훈민정음은 천하의 위대한 문헌으로서 우리나라 한 구역 안의 언어만을 기록하기 위한 책이겠는가? … 이러한 일은 오직 세종대왕 같은 총명하고 지혜로운 성인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鄭東愈(1744∼1808), 『晝永編)』) 한문은 간오(簡奧)함을 일상으로 여기는데 간오함으로 사정을 나누다 보면 잘못 보는 경우를 막을 수 없다. 하지만 언문으로 왕복하면 조금도 의심할 점이 없으니, 부녀자나 할 학문이라고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 율려와 음조는 귀로 들을 수 있어도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인데, 그것을 지금은 필묵으로 형용하게 되었으니 역시 기이한 일이다. … 만일 언문으로 기록하여 전한다면 아무리 오래 간들 어찌 본음이 변할 것을 근심할 것이랴?(柳僖(1773∼1837), 『諺文志』) 언문은 세종 때 세종대왕의 뜻으로 만들어졌는데, … 오만가지 표현하기 어려운 음[翻萬物難狀之音]도 다 기록할 수 있다. … 훈민정음은 … 비단 만국의 언어뿐만이 아니라 바람 소리, 비 소리, 새 소리, 짐승 소리, 벌레 소리 등 표현하기 어려운 소리까지도 다 표현할 수 있으며, 뒤집으면 중원의 무궁한 글자와 서역의 무궁한 소리까지도 다 그 가운데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李圭景(1788~ ?), 『五洲衍文長箋散稿』 詩文篇, 論文類, 文字, 「諺文辨證說」; 經史篇, 經傳類, 訓詁, 「反切翻紐辨證說」) 훈민정음은 가히 천하에 통용될 수 있다. … 훈민정음은 동음(東音)과 화음(華音)뿐만이 아니라 천하의 모든 음을 다 표기할 수 있다. … 자모절음(字母切音)은 본래 중국에서 만든 것이 아니고 서쪽[인도]으로부터 온 것이다. 서음(西音)으로 만든 것이 중국에 들어와 통행되고 있듯이, 동음으로 만들었다 하여 어찌 천하에 통용되지 못하겠는가?(鄭允容(1792~1865), 『字類註釋』) 등등 여러 곳에서 다양하게 훈민정음 즉 한글의 표음문자로서의 우수성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오만가지 말과 소리를 다 표현할 수 있고 또 분명히 전할 수 있어 천하에 통용할 수 있는 자랑스런 문자임을 말하고 있다. 훈민정음을 “천하 성음의 큰 법전”이라 한 신경준이 결코 외로운 목소리를 냈던 것은 아니었다. 그의 30년 지기이자 후원자였던 홍양호(洪良浩, 1724~1802)도3) 「경세정운도설서(經世正韻圖說序)」에서 아래와 같이 언급하여 그 대열에 동참하고 있었다. 글자가 명백하고 간단하면서 쉬워 아이들이나 부인들이 알 수 있도록 하였고, 그것을 확대하면 천하의 글을 다 표현할 수 있고 사방의 음을 통하는데 충분하다. 아 성대하구나 대성인의 업적은 복희가 괘를 긋고 창힐이 글자를 만든 일과 그 공이 같구나.4)
또 홍양호는 수레·벽돌의 사용, 당나귀·양의 목축 등 중국의 문물에 대하여 올린 상소문에서 화어(華語)를 익혀야 하는 일에 대하여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훈민정음의 활용을 건의하였다. 우리 세종대왕께서 … 창조하신 훈민정음은 … 무릇 사방의 언어와 갖가지 구멍에 나오는 소리들을 모두 붓끝으로 그려 낼 수 있게 되는데, 비록 길거리의 아이들이나 항간의 아낙네들이라 하더라도 또한 능히 통하여 알게 될 수 있는 것이니, … 이를 가지고 한음(漢音)을 번해(翻解)해 나가면 칼을 만난 올이 풀리듯 하여, 이로써 자음(字音)을 맞추게 되고 이로써 성률(聲律)도 맞추게 되었기 때문에 당시의 사대부들은 대부분 화어를 통달하게 되어, 봉사(奉使)하러 나가거나 영조(迎詔)하게 될 적에 역관(譯官)의 혀를 빌리지 않고도 메아리치듯 주고받게 되었던 것입니다.5)
훈민정음은 “길거리의 아이들이나 항간의 아낙네들이라 하더라도 또한 능히 통하여 알게 될 수 있는 것”으로 그 자체 훌륭한데, 더 나아가 화어, 즉 중국어를 익히는데도 유용함을 말하고 있다. 훗날 개항 이후, 전 수봉관(前守奉官) 이규(李)가 올린 상소의 대략에 지금 일본과 수호(修好)하고 있으나 그 나라 말이 통하지 않아서 교제(交際)하고 통상(通商)할 적에 벙어리끼리 상대하는 것과 같음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감히 일상 용어 약간을 유별로 모아서 올립니다. 저들의 말을 잘 아는 사람을 시켜 구체적으로 수정하고 언문으로 주석을 달아 책을 만들어 시장에서 팔게 하면 사람들이 쉽게 배울 수 있고 교제할 때 말이 막혀 장애 받는 현상을 면하게 될 것입니다.6)
라 하여 일본과의 통상을 위해 “언문으로 주석을” 단 일본어 교습서를 출판하여 팔도록 건의하였다. 언문은 이처럼 중국어뿐만 아니라 일본어를 배우는 데도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었다. 호남의 실학자, 여암 신경준 한글을 뜻하는 표현으로는 훈민정음 또는 정음, 그리고 언서, 언문, 향담(鄕談), 언자 등 다양했다. 이런 한글의 가치를 알고 이를 학문적으로 연구하여 그 맥을 이어준 인물이 바로 신경준이다. 신경준은 누구인가?7) 신경준의 본관은 고령, 자는 순민(舜民), 호는 여암이다. 그는 신숙주(申叔舟)의 동생 귀래정(歸來亭) 말주(末舟, 1429∼1503)의 10세손인 진사 뢰(洡)의 아들로 순창 남산대(南山臺) 마을에서 1712년 4월 15일 태어났다. 어머니는 한산(韓山) 이씨(李氏) 의홍(儀鴻)의 딸이다. 신말주는 단종이 왕위에서 물러나자 벼슬을 버리고 순창으로 내려왔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순창은 신말주 후손들의 세거지가 되었다. 한편 신경준은 어렸을 때 서울, 강화에서 수학하였고, 12살 때 순창으로 돌아온 이후 15년 동안 거주하였다. 26세 때 이주하여 소사, 직산 등을 거치며 살다가 33세 때인 1744년 다시 순창으로 돌아와 10년간 머물렀다. 41세 때인 1750년에 『훈민정음운해』를 저술하였다. 43세(1754, 영조 30)에 증광향시에 급제하면서부터 관직에 나아갔다.
이때 시장관(試掌官)이었던 홍양호와 만나 인연을 맺었다. 그는 향시 합격 이전에 이미 호남에서는 널리 알려져 있었다. 이후 그는 줄곧 호남을 대표하는 학자로 꼽혔다. 그러나 관직에 나가서는 유배를 당하는 등 순탄치 않은 생활을 보냈다. 그러다가 15년만인 1769년(영조 45)에 고향인 순창으로 돌아왔다. 그후 그가 지은 『강계지』를 본 영의정 홍봉한이 추천하여 비변사 낭청으로 차출되어 『동국문헌비고』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는 그밖의 여러 편찬사업에도 참여하였는데, 그중에서 『동국문헌비고』 편찬이 제일 컸다. 영조가 그렇다. 『동국문헌비고』의 근본은 신경준이다. 처음에 『강역지』로 해서 『동국문헌비고』를 만들게 되었으니, 그 공이 맨 앞에 있다.8)
고 하여 “가장 공이 많은 신하”로 지목하였다. 68세 때인 1779년(정조 3)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를 마지막으로 26년간의 서울생활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와 70세인 1781년(동 5) 5월 21일 순창의 옛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신경준에 대한 평가 일찍이 다산 정약용의 『여유당전서』를 출간했던 신조선사(新朝鮮社)에서 1939년 9월 홍대용의 『담헌서』를 인행하였고 이어서 신경준의 『여암전서(旅庵全書)』도 간행하였다. 이를 보도한 당시 「동아일보」의 기사 「여암전서(旅庵全書)의 출현」에서는 신경준에 대하여 일부 인사(人士)는 장흥의 존재 위백규와 흥해의 이재 황윤석과 동복의 규남(속칭 石城) 하백원과 함께 호남 사대학자(四大學者)로 일컬으나 이는 지방적 속평(俗評)이오, 선생 실학의 역사적, 문화적 지위는 실로 성호 이익, 다산 정약용으로 더불어 조선 근고(近古)의 삼대학자(三大學者)이다. 동시에 성호의 웅사(雄肆)와 다산의 정박(精博)을 역사적으로 연결시킨 기위적(奇偉的) 존재이다.9)
라 하였고, 또 같은 신문의 「이땅 실학계(實學界)의 결정(結晶) 신여암(申旅庵) 유서(遺著) 간행(刊行)」 기사에서 다시 그는 조선 근고 실학파의 거성으로 위로 반계 유형원, 성호 이익의 계통을 잇고 아래로 담헌 홍대용, 다산 정약용의 문호를 열어주니라 하여도 과언이 아닌 위대한 학자였다.10)
라 평가하였다. 그러니까 신경준은 호남의 4대 실학자에 속함은 물론, 이를 넘어 성호 이익과 다산 정약용을 잇는 징검다리 역할을 한 조선 근고의 삼대학자로 꼽을 만하다고 높이 평가하였다. 그리고 그의 학풍에 대하여는 부문허례(浮文虛禮)와 당쟁벌열(黨爭閥閱)만을 숭상한 당시 양반사회를 개탄히 여겨 학문의 진정한 목적을 실용·실학에 두었다.11)
라 하였고, 그의 학문의 주지(主旨)는 “과학적 사상과 인생의 실용”이었다고 하여 실학적 면모를 강조하였다. 그의 학문은 다각적이지만 그중에서도 『강계지』, 『동국문헌비고』 「여지고」, 『산수고』, 『사연고(四沿考)』 등의 저술을 펴내 조선사지학(朝鮮史地學), 즉 역사와 지리에서 두드러졌고, 지도학가(地圖學家)로서도 업적을 남겼다. 특히 어문학연구에도 큰 자취를 남겨 그의 창도로 정동유, 윤광수(尹光垂), 유희 등이 배출되었다. 그의 『훈민정음운해』는 최석정(崔錫鼎, 1646∼1715)의 『경세훈민정음도설(經世訓民正音圖說)』과 함께 15세기부터 18세기말에 이르는 조선조 어문학연구의 학맥을 잇는 위치에 있었다.12) 이처럼 그는 국토, 국사, 국어연구에서 선도적 역할을 함으로써 우리나라 국학의 토대를 확립하는데 주춧돌이 되었다.13) 그러나 “일세의 빈척(擯斥)과 일생의 불우에 몸을 바쳤다”14)고 하듯이 업적에 걸맞은 대우를 받지는 못했다. 신경준은 교유를 신중히 하여 조정에 있은 지 20여 년 동안 권문세가에 발길을 가까이하지 않았으며, 조그마한 벼슬이 모두 임금의 선발을 거쳤다. 그러나 문학으로 깊이 교유한 사람이 있었으니 이는 홍양호 한 사람뿐이었다.15) 이런 인연으로 홍양호는 『여암유고』의 서문도 쓰고 또 묘갈명도 썼다. 거기서 말하기를 신순민(申舜民)은 천하의 선비이다. 그의 학문은 통하지 않은 것이 없고 그의 재주는 큰일을 맡기에 충분하여 … 구류이교(九流二敎)를 두루 섭렵하였다. 천관(天官)·직방(職方)·성률(聲律)·의복(醫卜)의 학문과 역대 왕조의 헌장(憲章)이나 해외의 기이하고 희귀한 서적들, 괴팍스런 책[海外奇僻之書]까지도 그 깊은 이치를 찾아내 그 요체를 파악하지 못한 것이 없었다.16)
라 하였다. 노장과 불교사상은 물론 전국시대의 유가, 도가, 음양가, 법가, 명가, 묵가, 종횡가, 잡가, 농가 등 이른바 이교구류에 모두 능통한 학자라고 평가하였다. 그리고 “가히 류가 없는 굉재(宏才, 발군의 큰 재주)이며 세상에 드문 통유(通儒)라 할만하다”17)라고도 하였다. 실로 기이한 선비[信魁奇士]였다. 사승(師承) 관계가 없이 자득(自得)한 학문이라는 점에서뿐만 아니라, 이단에 관용적이며 기술과 실용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그의 학문은 18세기 사상사에서 매우 독특한 위치를 점한다.18) 그의 학문적 특징으로는 무엇보다 엄박(淹博)19), 해박(該博)20) 등을 꼽았다. 언어학자 신경준과 『훈민정음운해』 신경준은 그의 저서 『훈민정음운해』가 있어 언어학자로서 국어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1750년(영조 26)에 작성된 이 책은 운학서(韻學書)로서 『훈민정음』을 이어 유희의 『언문지』와 함께 조선 3대 국어학사의 대표적 성과로 꼽힌다. 이 책은 정인보에 의해 1937년 활자화되면서 빛을 보았다.21) 정인보는 해제에서 “이 책은 훈민정음 연구로서 기이하고 오묘하다”고 하면서 “사학(斯學)에 있어 그 중흥조(中興祖)로 추상(推尙)하여도 과할 것이 없다”라 하였다.22) 최현배도 “신경준은 음운학과 중국역학에 정통한 이로서 훈민정음에 대하여 음운학적 내지 역학적 설명을 시험한 것이 ‘훈민정음도해’이다. 그의 말한 바가 비록 이제 사람의 백분의 수긍을 얻기는 어렵다 할지라도 그의 제집학문[自家學]에로 향한 학적로작(學的勞作)은 확실히 한글갈[正音學]의 중흥사라 할만하다고 생각한다”고 하였다.23) 『훈민정음운해』는 훈민정음 창제 이후 훈민정음을 표음문자 차원에서 고찰한 저술이다. 이 책은 훈민정음의 작용, 조직, 기원을 논하여 과학적인 한글 연구의 기틀을 세운 것으로 평가된다. 더구나 해례본을 보지 않은 상태에서 훈민정음의 주요 원리를 집필한 것 자체가 큰 업적이다.24) 다음 편에서는 『훈민정음운해』는 어떤 책인지에 대하여 살펴보고, 이어서 한글의 역사를 짚어보면서 한글에 대한 바른 이해의 답을 찾아보고자 한다.
1) 『旅菴遺稿』 권3, 序 「韻解序」
2) 이 어록들은 이상혁, 「조선후기 훈민정음의 유통과 담론의 양상」(『韓國實學硏究』 29, 2015.06)을 토대로 작성하였다. 3) 홍양호는 여암의 사위와 문인이 찾아와서 “공(홍양호)이 아니면 누가 여암의 묘갈명을 감당하겠습니까”라며 부탁했을 때 그가 말하기를 “그러하네, 내가 실로 기다리던 것이네”라 하고 마침내 눈물을 훔치며 묘갈명을 서술하였다고 하였다. 그만큼 신경준과 가까웠다. 『旅庵遺稿』 권13, 附錄, 「墓碣銘(大提學洪良浩撰)」 참조. 4) 『耳谿集』, 권10, 序, 「經世正韻圖說序」 5) 『정조실록』 16권, 정조 7년(1783) 7월 18일 2번째 기사 6) 『고종실록』 19권, 고종 19년(1882) 12월 6일 4번째 기사 7) 이 부분은 고동환, 「旅菴 申景濬의 학문과 사상」(『지방사와 지방문화』 6(2), 2003.11, 역사문화학회); 유기상, 『조선후기 실학자의 풍수사상』(경인문화사, 2017) 중 제6장 「희세의 통유, 여암 신경준의 삼교회통과 풍수사상」 등을 참조하였다. 8) 『승정원일기』 영조 46년(1770) 윤5월 16일. 박광용, 『영조시대를 만든 사람들』(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4.06), 109쪽. 9) 「東亞日報」, 1939.9.22, 조간 1면 종합, 「旅庵全書의 出現」 10) 「東亞日報」, 1939.9.22, 조간 2면 경제, 「이땅 實學界의 結晶 申旅庵 遺著刊行」 11) 「東亞日報」, 1939.9.22, 조간 1면 종합, 「旅庵全書의 出現」 12) 김일, 「신경준의 훈민정음운해와 그의 역학적 언어관」(『중국조선어문』, 2001(3), 2001.05, 길림성민족사무위원회), 26쪽. 13) 고동환, 앞 글, 200쪽. 14) 「東亞日報」, 1939.9.22, 조간 1면 종합, 「旅庵全書의 出現」 15) 『旅庵遺稿』 권13, 附錄, 行狀[禮曹判書申獻求敬撰] 16) 『旅庵遺稿』 권13, 墓碣銘, 墓碣銘[大提學洪良浩撰] 17) 『旅菴遺稿』 序, 旅菴遺稿序[洪良浩] 18) 고동환, 앞 글, 180쪽. 19) 『頤齋亂藁』 권11, 初六日庚申 “余曰 以南中文官言之 高低貴賊 通共七十餘人 見今生存 文學則李基敬 淹博則申景濬 若其孝友而兼有文詞者 安正言致宅是也” 20) 『頤齋亂藁』 권9, 1767년(영조 43) 丁亥 十二日壬申 “申(景濬)則能古文詞該博鮮比 在南中文官 盖無與並者矣” 21) 이 책은 사본으로 전해져 내려오다가 조선어학회에서 간행한 『한글』 제5권 3호(1937년 3월)부터 제5권 11호(1937년 12월)에 걸쳐 김완근(金緩根) 씨 소장본을 저본으로 하여 “훈민정음운해”란 제목으로 활자화되었고, 정인보가 해제를 썼다. 1938년에 동 학회에서 단행본으로 간행하였다. 1939년 『여암전서』가 간행되었을 때에도 수록되었다. 김완근씨 소장본은 지금 숭실대 기독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1987년에 동 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영인하였다. 기타 서울대, 연세대 도서관, 장서각 등에도 후사본(後寫本)이 있다. 伊藤英人, 「申景濬의 『韻解訓民正音』에 대하여」(『국어학』 25, 1995) 22) 김슬옹, 「신경준, 『운해훈민정음[邸井書]』의 정음 문자관」(『한말연구』 제39호, 한말연구학회, 2016.03), 36쪽. 23) 김일, 앞 글, 23쪽. 24) 김슬옹, 『조선시대의 훈민정음 발달사 – 조선시대의 훈민정음 보급과 활용의 통합언어학적 연구』(역락, 2012), 594쪽. 글쓴이 고석규 목포대학교 前 총장, 사학과 명예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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