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그림 이야기] 잠시 꾸었던 금빛 꿈, 그림에 담다 게시기간 : 2021-09-13 07:00부터 2030-12-17 21:21까지 등록일 : 2021-09-08 17:34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옛 그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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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광>은 목재 허행면이 고흥군 소재 금광채굴 사업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린 것이다(그림 1). 2m에 가까운 큰 화면에 금광을 채굴하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린 이 그림은 허행면이 1943년 제22회 조선미술전람회(이하 선전)에 입선한 <자원개발>로 추정되는 작품이다. 금광 열풍 1930년대 한국은 이른바 ‘황금광시대’였다.*) 이 시기는 일제의 금 수탈 정책이 추진되었고 많은 양의 금이 한반도에서 생산되면서 금광 개발 열기가 뜨거웠다. 어두운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사람들의 열망이 맞물리면서 너도나도 금맥을 찾기 위해 산으로 들로 강으로 떠났다. 전설적인 금광왕들도 탄생했는데, 그 중 조선 제일의 금광왕으로 최창학, 이종만, 박용운, 방응모 등이 있으며, 이 가운데 방응모는 금광으로 떼돈을 번 이후 조선일보사를 인수했다. 당시 소설과 신문, 잡지 기사는 이러한 금광열풍을 상세하고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예술가들의 상상력 속에서도 황금광시대는 화려하게 꽃피었다. 특히 문학 작품에 고스란히 투영되어 금광을 모티프로 하는 작품들이 대거 탄생하였다. 한수한의 ‘금산’(1932)을 비롯해 방인희의 ‘황금광 시대’(1934), 옥혈천의 ‘금광’(1934), 그리고 김유정의 ‘금 따는 콩밭’(1935), ‘금’(1935), ‘노다지’(1935) 등 이 외에도 많은 단편이 전한다. 한편 채만식이나 김기진 같은 경우는 직접 금광에 큰돈을 투자했다가 고스란히 날리기도 했다. 채만식은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금의 정열’(1939)이라는 장편소설을 남겼다. 김유정의 소설 ‘금 따는 콩밭’에서는 선량하고 순박한 농부 영식이 친구의 꼬임에 빠져 멀쩡한 콩밭을 갈아엎고 금맥 찾기에 몰두한다. “일 년 고생하고 끽 콩을 얻어먹느니보다는 금을 캐는 것이 슬기로운 것이다. 하루에 잘만 캔다면 한 해 줄곧 공들인 그 수확보다 훨씬 이익이다. 이렇게 지지하게 살고 말 바에는 차라리 가로지나 세로지나 사내자식이 한 번 해 볼 것이다.(중략) 시체(時體)는 금점이 판을 잡았다. 섣부르게 농사만 짓고 있다간 결국 비렁뱅이밖에는 더 못 된다. 얼마 안 있으면 산이고 논이고 밭이고 할 것 없이 다 금장이 손에 구멍이 뚫리고 뒤집히고 뒤죽박죽이 될 것이다. 그 때는 뭘 파먹고 사나.”**)
금광 열풍에 부화뇌동하는 주인공이 금을 캐기 위해 자신의 콩밭을 갈아엎는 어리석음을 풍자한 것인데, 실제로도 금을 캐던 장소는 무척이나 다채로웠다. 돌산을 깨서 금맥을 찾기도 했고, 시냇가나 개천바닥을 뒤져 사금을 건져 올리거나 멀쩡한 논을 갈아엎어 곡식대신 금을 건져 올리기도 했다. 한껏 투기로 치닫던 금광열풍은 1940년대 태평양전쟁으로 일본이 군수 물자 생산에 집중하면서 점차 사그라들었다. 1945년 일본의 패망과 함께 수백 개의 광산도 하루아침에 문을 닫게 되었다. *) 전봉관, 『황금광시대』, 살림, 2005.
**) 김유정, 「금 따는 콩밭」 허행면이 직장이었던 전남도청을 그만두고 고흥에서 금광채굴 사업에 뛰어든 것은 1941년이었다. 이때는 이미 그 열기가 식어가던 즈음이었다. 그런데 왜 고흥을 택했을까. 예부터 고흥군의 몇몇 곳은 금이 많이 묻혀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왔다. 거금도의 경우 금맥이 산에 있다 해서 거금도(居金島), 거억금도(居億金島)라고도 불렀다고 하며, 어전리(於田里) 금장(金藏)의 경우 금이 많이 묻혀 있어 금장 또는 진장(眞藏)이라 했다. 이 외에도 석정리(石井里) 동정(桐井)에는 금이 매장된 마을이 있어 고라금(古羅金)이라 부르기도 했단다.*) 이처럼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이야기는 허행면의 가슴에도 불을 지폈을 것이다. 하지만 금을 캐내는 일은 만만치 않았던 듯, 1년 여 만에 금광사업은 실패하고 만다. 비록 금광을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그때의 그 경험을 살려 잠시나마 꾸었던 금빛의 꿈을 허행면은 <채광>이라는 그림에 담아내었다. 의재동생 목재 목재 허행면(木齋 許行冕, 1906-1966)은 의재 허백련의 동생이다. 연진회 창립(1938년)을 계기로 화업을 시작해 1939년 선전(1922-1944)에서 입선하며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허행면은 형인 의재 허백련이나 남농 허건에 비해 미술사에서 크게 주목받지는 못했는데, 이는 광산채굴사업, 제지공장 등을 운영하면서 화가로서 늦게 출발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品格에서는 형인 의재를 따라가지 못하나 技法만큼은 능가한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으며, 1940년대 동강 정운면(東岡 鄭雲, 1906-1948), 임인 허림(林人 許林, 1918-1942) 등과 함께 광주화단에서 다양성을 추구했던 작가로 꼽힌다.**) 허행면은 미산 허형에게서 서예와 사군자 등을 배웠으며 1938년 허백련이 연진회를 발족시키자 여기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인 회화수업을 받았다. ‘목재’라는 호는 허백련으로부터 받았다.***) 연진회를 통해 허행면은 전통화법을 계승하고 허백련의 표현법을 받아들였다. 또한 이 시기 동강 정운면을 비롯한 연진회 화가들과 교유하면서 당시 화단의 경향에 경도된 듯한 모습을 보인다. 1939년 18회 선전에 산수화를 출품하여 처음으로 입선하면서 화가의 길로 들어섰다. 금광사업 이외에도 제지공장을 운영했던 허행면은 사업과 화업을 병행하였다. 여러 전람회에 작품을 출품했고 개인전도 열었다. 1943년 22회 선전에 <자원개발>이라는 제목의 작품으로 또한번 입선하면서 화가로서 면모를 다졌다. *) 고흥군청 https://www.goheung.go.kr/
**) 김소영, 「해방이후 광주화단과 목재 허행면」, 『호남문화연구』제62집(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2017), pp. 207-238. ***) 허백련의 ‘의재(毅齋)’는 무정 정만조(戊亭 鄭萬朝, 1858-1936)가 지어준 것으로 이는 논어의 ‘강의목눌지근인(剛毅木訥之近仁)’이라는 글에서 발췌한 것이다. 이에 근거하여 허백련은 ‘의(毅)’자 다음인 ‘목(木)’자를 빼내어 ‘목재(木齋)’라는 호를 동생에게 지어주었다고 한다. 사생을 통한 근대적 미감의 형성 <채광>은 전체적으로 섬세한 선과 필치, 그리고 바탕에 호분을 칠하여 온화한 채색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화면 전체를 가득 채운 금광 입구의 모습과 자갈, 그리고 짐을 나르는 인부 등은 사생을 거쳐 표현되었다. 전통 남종화보다는 근대적 미감의 기법과 소재이다. 현실의 풍경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면서 수채화와 같은 채색을 더해 부드러운 감각적 분위기를 나타냈다. 일본 남화풍의 영향이 간취된다.
허행면은 이 작품에서 나무나 풀 언덕과 구릉 등의 표현에서 고법산수에서 사용하던 준법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대신 입체감과 음영을 나타내려 노력했다. 그러면서 섬세한 세필로 철저한 분위기 묘사에 집중하고 있다. 그래서 완성된 구도의 이상적인 산수공간 보다는 풍경의 일부를 클로즈업하고 주변은 과감하게 생략하는 스냅사진과 같은 느낌을 준다. 이 같은 화면 구성의 변화는 관전(官展)양식에 부합하려는 시도였을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작품은 정형화된 수묵산수화로부터 벗어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그림에 대해 형인 허백련의 평가는 부정적이었다. 허백련은 허행면이 전통남화와 문인화를 그리기를 원했고 그에게 ‘작대기 산수’를 하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작대기 산수’는 그림에서의 문기(文氣)를 강조하는 것인데, 문기는 없고 섬세한 세필을 사용하여 분위기만 남은 이러한 제작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해석된다. 허행면은 그러한 허백련의 조언보다 섬세한 필선을 즐겼고 오히려 “형님의 그림은 너무 거칠다”라고 했다고 한다. 또한 문기를 강조한 형에게 “그림은 어디까지나 그림이어야 합니다. 그림이 어디 선비들만 좋아해서야 되겠습니까? 아무나 봐서 좋으면 그 그림은 좋은거지요”라고 하였다.**) 허행면의 작품 가운데 <채광>과 같은 작품은 더 이상 발견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채광>은 허행면의 화업 중 실험적인 작품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아마도 화단에 유행하고 있는 일본화풍 등에 영향을 받아 그 자신도 실험삼아 그렸을 것으로 추정한다. 허행면은 곧바로 전통화법으로 돌아왔지만 필선은 섬세해졌으며, 일본식 채색을 빼는 대신 담담한 색을 입힌 사경산수화를 제작하였다(그림 2).
그림 2 허행면, <물레방아>, 1950년대, 종이에 수묵담채, 65×33cm, 의재미술관 *) 문순태, 『의재 허백련』(중앙일보․동양방송, 1977), p. 170. 이는 미산 허형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것으로, 허백련 또한 소치 허련의 ‘작대기 산수’를 추구하였고, 자신뿐만 아니라 제자들에게도 작대기 산수를 가르쳤다.
**) 문순태, 위의 책, p. 169. 목재스타일 1950년대 이후 허행면은 폭넓은 삶의 경험과 인생의 굴곡을 통해 체득한 필법으로 전통화법과 사경산수를 결합한 ‘목재스타일’을 구축하였다. 특히 화훼그림인 ‘군방도(群芳圖)’는 당시 화단에서 대단히 명성이 높았다.
허행면의 군방도는 길상의 뜻을 가진 모란, 수선화, 들국화, 채송화 등 다양한 화훼와 함께 사군자를 담아냈기 때문에 많은 이들에게 인기가 있었고 수요도 많았다. 해방 이후 1950년대 국전(國展)시대로 들어서면서 허행면은 자신만의 독자성을 갖춘 사경산수화 양식의 정립하였으며 전통화법의 끈을 놓지 않고 ‘전통의 고수와 현대화’를 추구하는 면모를 보여주었다. 참고문헌 및 인용출처 김소영, 「해방이후 광주화단과 목재 허행면」, 『호남문화연구』제62집,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2017, pp. 207-238.
김유정, 「금 따는 콩밭」 문순태, 『의재 허백련』, 중앙일보․동양방송, 1977. 백계철, 「木齋 許行冕의 生涯와 藝術」, 조선대학교대학원 순수미술학과 석사학위논문, 1987. 전봉관, 『황금광시대』, 살림, 2005. 고흥군청 https://www.goheung.go.kr/ 글쓴이 김소영 전남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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