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초대석] 호남 사림, 충북 음성 공자당에서 시를 읊다_박상의 경물시 게시기간 : 2021-09-15 07:00부터 2030-12-17 21:21까지 등록일 : 2021-09-13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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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시초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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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상이 지은 경물시(景物詩) 이 시는 박상(1474~1530)이 충북 음성군 생극면 팔성1리 말마리(秣馬里)에 소재한 공자당(工字堂)에서 지었다. 두 수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중 첫 번째이다. 굳이 시 종류를 말하자면, 경물시라 할 수 있다. 제목을 살피면, 김공석이 만든 새로운 당의 모양은 ‘공(工)’ 자인데, 거기에 시를 썼다라고 하였다. ‘공석’은 김세필(金世弼, 1473~1533)의 자이다. 그러니까 김세필이 새로운 당을 만들었는데, 그 모양은 ‘공’ 자로, 박상이 이를 기념해 경물시를 지은 것이다. 시 내용을 이해하기 쉽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공’ 자 모양의 새로운 당은 작은 산을 등지고 있고, 앞에 개울이 있는데, 마치 당긴 활보다 굽어 있다. 또한 물을 막은 모래 둑은 마치 용의 등뼈처럼 가로 놓여 있고, 처마와 엇갈린 듯한 새로운 길은 안개가 낀 산까지 솟아있다. 주변에 있는 밭을 보니, 생강 잎은 들쑥날쑥 피어있고, 국화 싹은 겨우 나온 듯이 보였다. 이러한 경물을 본 나는 술잔을 들고 조용한 일을 찾으면서 세속의 어지러운 일에 상관하지 않는다.
이 시는 총 여덟 구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중 여섯 구에서 경물을 읊었고, 마지막 두 구에서 작자의 심리를 적었다. 이로써 이 작품이 경물에 치중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특히 앞 네 구에서 먼 곳에 있는 경물을 그렸고, 그 다음 나머지 두 구에서 가까이 있는 경물을 그린 점이 눈길을 끈다. 곧, 경물을 주로 그린 작품이기 때문에 감정 이입은 상당히 절제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박상은 김세필과 어떤 인연으로 말마리에 있는 공자당에서 시를 짓게 되었을까? 다음 내용을 통해 이 의문을 해결해본다.
2. 박상의 충주 목사 부임부터 말마리 이름이 생기기까지 박상의 자는 창세(昌世)이고, 호는 눌재(訥齋)이며, 본관은 충주(忠州)이다. 박상은 그의 나이 46세(1519, 중종14) 10월경에 어머니 상(喪)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곧이어 11월 15일에 기묘사화가 일어났다. 기묘사화는 남곤(南袞)ㆍ홍경주(洪景舟) 등 훈구파가 주동을 하여 조광조(趙光祖) 등 신진 사류를 숙청한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으로 인해 수많은 사림들이 희생을 당하는데, 박상은 어머니의 상에서 이제 막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화를 당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때 자신과 같은 사림들이 죽거나 유배를 가는 등 화를 입은 모습을 보고 부채(負債) 의식을 지녔으리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기묘사화가 끝난 이후 곧바로 벼슬이 내려졌으나 나아가지 않고, 이듬해 47세 가을에 어사가 되어 호남의 재해(災害)를 시찰하는 것에 그친다. 이어 48세 봄에 상주 목사(尙州牧使)가 되었다가 같은 해 여름에 충주 목사(忠州牧使)로 부임했는데, 52세 사도시 부정으로 자리 이동을 하기 이전까지 소임을 다한다. 충주 목사에 부임한 박상은 시간이 나면 인근에 살던 기묘사화 때 화를 입은 사림들을 만나기 시작하였다. 당시 충주를 비롯한 인근에 기묘사화 때 화를 입은 사림들이 여러 명 있었는데, 박상은 공서린(孔瑞麟), 김세필(金世弼), 이약빙(李若氷), 이연경(李延慶), 이자(李耔) 등을 주로 만났다. 공서린은 조광조와 친하다는 이유로 기묘사화 때 투옥되었다가 풀려났고, 김세필은 기묘사화가 끝난 이후 중종(中宗) 앞에서 말한 것이 화근이 되어 유춘역(留春驛)에 유배 갔는데, 2년 뒤 사면을 받았으나 복직하지 않고 충주 지비천(知非川, 현 충북 음성군 생극면 팔성리) 가에 우거하면서 ‘지비옹(知非翁)’이라 자호하였다. 박상은 이때 충주 목사로 부임한 뒤 지비천 가에 살고 있던 김세필을 자주 찾아가 강학을 하는 등 학문을 논의하였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김세필이 공자당을 지을 때 도움을 주었다. 이약빙은 기묘사화 때 조광조와 형 이약수(李若水)의 사면을 주청하다가 파직되었고, 이연경은 중종의 신임 덕분에 유배를 가지 않았으나 그 대신 벼슬에서 물러난 뒤 청주 북촌에 살면서 스스로 ‘탄수(灘叟)’라 하였다. 마지막으로 이자는 기묘사화를 당한 뒤에 음성(陰城) 음애동(陰崖洞)으로 이거한 뒤 자호를 ‘음애(陰崖)’라 하였다. 이처럼 박상은 충주 목사 시절에 기묘사화 때 화를 입은 사림들과 끈끈한 우정을 유지하였고, 이들 피화인(被禍人)들도 박상에게 의지하였다. 그래서 마침내 이러한 미담은 훗날까지 전해져 허균(許筠)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정암 조광조가 북문의 화를 당하자 당시의 선비들이 의지할 곳이 없었는데 공(박상)이 모두 돌보아 주었으므로 김성동(金省洞, 김세필), 이음애(李陰崖, 이자), 이탄수(李灘叟, 이연경) 같은 사람들이 다 가서 의지하였다.
(『성소부부고』 권23, 「성옹지소록인」 중) 인용문 중에 나온 ‘북문의 화’는 기묘사화를 말한다. 허균의 말에 따르면, 기묘사화 때 많은 선비들이 의지할 곳이 없었는데, 당시 충주 목사를 지내고 있던 박상이 모두 돌보아 주었으므로 여러 사림들이 의지했다고 하였다. 이들 피화인 중에서 박상이 특히 친하게 지낸 사람은 김세필이었다. 박상의 문집 『눌재집』에 김세필과 관련한 시가 총 13제 46수 전하고 있고, 김세필의 문집 『십청집』에 박상과 관련한 시가 총 20제 51수가 전하는데, 이는 다른 피화인들의 시와 대비했을 때 압도적인 수치이다. 이렇듯 친밀했기 때문에 김세필이 지비천 가에 당을 짓는다고 할 때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당을 모두 지은 뒤에 당 중앙에 기둥이 있었는데, 마치 그 모습이 ‘工’ 자처럼 보여 이름을 ‘공자당’이라는 이름을 붙였던 것이다. 이 공자당은 그 당시 인근에 살던 기묘사화 때 화를 입은 사림들을 모으고 규합하는 곳으로 그 의미가 사뭇 컸다. 다음 내용을 통해 당시 공자당이 지닌 의미와 아울러 박상이 펼친 또 다른 선행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다. 김십청(金十淸)이 충주 지비천 가에 집을 지었는데, 선생은 그때 충주 목사로 있었다. 지은 집은 모양이 마치 ‘공’ 자 같았는데, 양쪽에 침실이 있고 중앙의 대청은 강학하는 곳이었다. 그 당시 기묘년의 참상의 화를 겪은지라 학문을 꺼리던 터였다. 그런데 오직 선생은 늘 ‘공자당’에 오고가면서 십청, 모재(慕齋)와 함께 도학을 강론함이 더욱 독실하였고, 후학들을 가르쳤다. 그때 모재는 여강에 있어서 충주와는 서로 가까웠다. 매년 봄에 선생은 몸소 여주에 가서 목주 이희보(李希輔)를 만나 관청에서 파는 곡식 200석을 받아 배로 운반하여 두 분과 학도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가을이 되면 또 쌀을 실어다가 자신이 갚아주었고, 매년 그것을 상례로 하였다. 녹봉으로 받은 쌀을 직접 주지 않은 것은 대체로 혐의를 멀리하기 위해서였다.
(『눌재집』 부록 권2, 「서술」) ‘김십청’에서 ‘십청’은 김세필의 호이고, ‘모재’는 김안국(金安國)의 호이다. 김세필은 기묘사화 때 화를 입은 사림이라고 앞에서 이미 언급하였고, 김안국도 기묘사화 때 화를 입은 사림 중 한 명이다. 위 인용문은 두 가지 내용을 실었다. 전반부는 공자당과 관련한 내용이고, 후반부는 박상이 당시 여주 목사 이희보에게 곡식 200석을 꾸어다 김세필ㆍ김안국 및 학도들에게 나누어주고 가을에 갚았다는 내용이다. 마지막 부분에 “녹봉으로 받은 쌀을 직접 주지 않은 것은 대체로 혐의를 멀리하기 위해서였다.”라고 했으니, 박상이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 얼마나 조심스레 행동했는지를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박상은 김세필과 우정을 돈독히 하며, 공자당을 지을 때 도움을 주었고, 아울러 먹을 양식도 가져다주었다. 공자당의 주인은 김세필이지만 박상도 이 공자당을 아끼고 사랑하였다. 그래서 박상은 공자당과 관련해 여러 편의 시를 지었는데, 앞에서 살핀 「김공석의 새로운 당에 썼는데, 당의 모양은 ‘공’ 자이다1」은 그중 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김공석의 새로운 당에 썼는데, 당의 모양은 ‘공’ 자이다1」 작품을 통해 박상은 공자당 주변의 멀고 가까운 경물을 자세히 나타내보였으니, 평소 세밀한 관찰을 하지 않았다면 묘사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한편, 박상은 김세필을 만나러 갈 때 늘 말을 타고 가서 지비천 가의 무성하게 우거진 숲 아래에 매어두고 공자당까지 걸어갔다고 한다. 그래서 말을 매어둔 그곳을 말마리 또는 말갯둑이라 부르게 되었고, 마을 이름도 이에 의거해 ‘말마리 마을’이라 부르고 있다. 이처럼 ‘말마리’라는 이름은 박상과 김세필의 우정에서 나온 이름으로 현재 마을 사람들의 기억 속에 연연히 이어져 오고 있다.
3. 박상, ‘기묘완인(己卯完人)’이란 칭호를 받다 박상이 세상을 뜬 뒤에 정조(正祖)를 비롯해 여러 사람이 그를 평가하였다. 그중에 퇴계 이황의 평가를 적어본다. 눌재는 기묘년의 앞일을 알고 멀리 물러나 있는 식견을 지녀 뭇 간사한 자들이 일을 꾸밀 때 초연하게 화복에 얽혀들지 않아 마침내 원우(元祐)의 완인(完人)이 되었다.
(『눌재집』 부록 권2, 「서술」) ‘원우’는 중국 송나라 철종의 연호이고, ‘완인’이란 덕행이 완전한 사람을 가리킨다. 철종 때 당쟁이 극심한 때에 유안세(劉安世)가 홀로 바른 길을 지키면서도 끝내 해를 입지 않았는데, 여기에서 유래한 말이 ‘원우완인’이다. 이황이 이 말을 한 이후 박상을 가리켜 ‘기묘완인’이라 부르게 되었으니, 원우완인을 살짝 응용해 만든 말이라 할 수 있다. 유안세는 당시에 매우 강직하여 직언을 잘 했기 때문에 궁궐의 호랑이라는 뜻을 가진 별칭 ‘전상호(殿上虎)’를 얻었는데, 박상도 그에 못지않은 덕행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이황이 “원우의 완인이 되었다.”라고 했던 것이다. 박상은 기묘사화 때 어머니 상을 막 벗어난 시점이어서 직접 화를 당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화를 당한 사림들과 마음만은 같았다. 이러한 한결같은 마음은 충주 목사 시절 기묘년에 화를 입은 사림들을 도울 때 여실히 나타났는데, 그 공간의 중심에 공자당이 있었다. 따라서 말마리 마을에 있는 공자당은 당시 사림들이 마음을 붙여 의지하던 공간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참고 자료> 김세필, 『십청집』
박 상, 『눌재집』 이 자, 『음애집』 이 황, 『퇴계집』 허 균, 『성소부부고』 글쓴이 박명희 전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강의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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