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서와 옛편지] 제대로 천거하지 않는다면 재앙을 입으리라, 사관(史官)의 자격 게시기간 : 2020-04-09 07:00부터 2030-12-17 21:21까지 등록일 : 2020-04-08 10:31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고문서와 옛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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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학회에서는 매월 학술발표회를 하면서 한 시간 정도는 새로운 고문서 자료를 소개하고 강독하는 시간을 가진다. 보통은 흔히 볼 수 있는 고문서를 가지고 초서 공부 겸하여 강독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간혹 독특한 고문서들이 소개되기도 한다. 10여 년 전에 강독에서 읽고 덮어두었던 자료에는 춘추관 문서가 있다. 서울역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경상도 칠곡의 광주(廣州) 이씨가에서 나온 문서이다. 그림1 이도장 춘추관 문서 勅/ 承文院博士李道長/ 來初十日 政府良中/ 史官取才時 綱目·左/傳·宋鑑 各二十件 及/講紙竝以 同日罷漏/時齎來事 丁丑十二月初四日 春秋館(署押) 승문원 박사 이도장에게 신칙함. 오는 초10일에 의정부에서 사관 취재할 때에 강목, 좌전, 송감 각 20건을 강지와 함께 그날 파루 시에 가지고 올 것. 정축년(1637, 인조15) 12월 초4일 춘추관(서압) 1637년 12월 초4일에 춘추관에서 발급한 이 문서는 제목인지 서술어인지 모를 ‘칙’이라는 글자가 모두(冒頭)에 쓰여 있고, 이 문서를 받는 사람으로는 승문원 박사 이도장이라고 되어 있다. 이 문서는 칠곡 광주이씨 집안에서 나온 문서이므로 이도장이 받은 문서임에는 틀림이 없다. 사관 취재를 하는데, 강목, 좌전, 송감 등 서적 각 20건과 시험 볼 강지를 가지고 파루 시에 의정부로 가지고 오라는 명령서이다. 파루는 통금이 끝나는 시간이므로 매우 이른 새벽 시간이다. 여기에서 문제는 이 문서를 받은 이도장은 사관 취재의 대상인가 아니면 사관 취재를 도와주는 관원인가 하는 것이다. 당연히 이도장이 사관이 되는 대상으로 생각하였다. 실제로 1637년 이후 몇 년 동안 검열, 봉교, 대교 등 사관의 직임을 받았다. 그런데 같이 강독한 사람 중에서 의문을 제기한 사람이 있었다. 시험을 볼 사람이 시험 볼 교재를 가지고 가는 것이 좀 이상하다는 것이다. 사관 취재를 담당하는 관원으로는 물론 현재 재직 중인 사관들도 있겠고 또 집책관(執冊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도장의 관력(官歷)을 면밀히 검토해보면, 1630년에 식년 문과에 합격한 이도장이 가주서(假注書), 주서(注書) 등의 직책을 수행하다가 1634년 부친상을 당하여 2년간 시묘살이를 하고 1636년 11월 주서로 복직하였다. 1637년 12월 2일에는 갑자기 승문원 박사(承文院博士)가 되었다가, 위 춘추관 문서에 보이듯이 12월 10일 사관 취재를 거쳐서 12월 15일에는 사관 말직인 검열(檢閱)에 임명되었다. 이후 12월 25일 대교(待敎)가 되고 1638년 4월에는 봉교(奉敎)가 되었다. 봉교로 5월까지 근무한 후, 5월 20일에는 전적(典籍), 6월 20일에는 병조 좌랑(兵曹佐郞)이 되었다.(『승정원일기』 참조) 의정부로 오라는 것은 의정부가 바로 시험장이라는 것이고, 사관 취재의 시험관들은 영춘추(領春秋)인 영의정, 감춘추(監春秋)인 좌의정과 우의정, 지춘추와 동지춘추인 대제학, 직제학 등 많은 고위 관료들이다. 그래서 20권이나 되는 책이 필요한 것이다. 시험 볼 대상 과목은 『강목』, 『좌전』, 『송감』 등 모두 역사서들이다. 『강목』이나 『좌전』, 『송감』은 모두 중국 역사서이다. 사관이 되기 위해서는 중국의 역사서를 줄줄이 꿰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긍익은 『연려실기술』에서 사관을 엄격하게 선발하는 과정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오래된 관행이, 한림을 새로 추천할 때에 현임 하번 사관이 주관자가 되어서 여러 동료들과 함께 모여 새로 추천할 대상을 상의하는데, 문을 닫아걸고 비밀리에 회의를 하여 추천의 순차를 정하고 추천이 완료되면 한림을 역임한 전임자들과 홍문관, 예문관 양관 당상관들에게 회천(回薦)을 하고 이들의 이의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다음에 분향(焚香)하고 황천후도(皇天后土)에 고한다고 한다. “역사를 쓰는 임무는 나라의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제대로 된 사람을 천거하지 않았다면 반드시 재앙이 있을 것입니다.[秉筆之任 國家最重 薦非其人 必有其殃]”라고. 그리고 마지막 단계로 사관 취재 시험이 있는 것이다. 삼공(三公, 영의정과 좌우의정)과 의정부 동서벽(東西壁), 홍문관과 예문관, 이조의 당상이 함께 앉아 천거를 받은 사람에게 『강목』, 『좌전』, 『송감』 등을 강하게 하여 순위를 정하는 것이다. 사관 취재 시험은 사관 선발 과정의 마지막 단계로 나라의 역사를 기록하는 일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였는지, 사관의 자격이 얼마나 엄격한가를 보여준다. 지금까지 파악한 춘추관 문서는 위와 같이 총 5점을 더 볼 수가 있었다. 이중 제일 이른 시기의 것은 1603년 배용길이 받은 문서이고, 암행어사로 유명한 박문수가 1724년에 받은 문서도 있다. 물론 이외에도 더 많은 춘추관 문서가 나올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림2 배용길 춘추관 문서
그림3 조복양 춘추관 문서
그림4 박문수 춘추관 문서
그림5 윤광운 춘추관 문서 사관은 한림이라고도 하는데, 예문관의 검열 4원(員)과 봉교, 대교 각 2원 모두 8원이 정원이었다. 이들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관 즉 전임 사관이다. 이들 이외에도 승정원의 승지나 주서(注書), 홍문관, 사헌부, 사간원의 관원, 이조와 병조의 전랑(銓郞) 등 주요 청요직을 띤 관료들은 겸사관(兼史官)의 직책을 가지고 있어서 넓은 의미의 사관에는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승정원은 주서는 승정원의 일기를 작성하고 관리할 책임을 맡고 있어서 거의 사관과 다를 바 없는 업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사관은 조선 양반관료제 사회를 지탱해온 중요한 직제 중의 하나였다. 청선(淸選), 청요직(淸要職)으로 불렀던 사관에 임명되는 것은 다른 어느 직책보다도 매우 엄격하였다. 치열한 과거 공부를 통하여 대과인 문과에 급제해야 비로소 엘리트 코스에 진입할 수 있다. 문과는 자격시험이 아니라 임용시험이기 때문에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모두 관직에 임명된다. 이들은 관직의 첫걸음으로서 분관(分館)이라는 것을 하는데, 승문원이나 성균관, 교서관에 요즘 용어로 시보(試補)라고 할 수 있는 권지(權知)로 임용된다. 이렇게 문과에 합격한 엘리트 중에서 또다시 선배들의 심사와 추천, 그리고 간단한 테스트를 거쳐서 사관직인 검열에 임명된다. 여기에서 선배들의 심사와 추천이란 한림 회천(回薦)과 분향(焚香)을 말한다. 검열, 대교, 봉교 등을 역임한 선임 사관의 추천을 받는 것을 한림 회천이라고 하는데, 한 사람이라도 반대가 있으면 추천이 되지 않는 절대 평가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사관의 추천을 둘러싸고 당파 간에 치열한 정쟁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1654년(효종5) 35세의 나이에 문과에 합격하여 다음해 4월에 검열이 되고 가을에는 대교, 그 다음해에 봉교가 된 『휘찬여사』와 『동국통감제강』 등 역사서를 쓴 홍여하(洪汝河)는 서인 송규렴(宋奎濂)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의 당여(黨與)인 이상진(李象震), 이원정(李元禎)을 추천한 일로 결국 파직되었다. 이렇게 중시되던 사관 선임 제도가 1741년(영조17) 전랑 통청, 한림 회천의 법규를 혁파함으로써 그 의미가 무너졌다. 실록에는 ‘이조 낭관의 통청법과 한림 회천 규정을 혁파하도록 명함[命革罷吏郞通淸之法及翰林回薦之規]’이라는 제목으로 전랑 통청권과 한림 회천권의 혁파를 알리고 영조가 매번 조정에 붕당이 있는 것을 걱정하였는데, 이조 낭관과 한림을 선발할 때마다 피차간 두 당이 서로 자기편은 올리고 반대편은 억제하며 끝없이 싸워서 국왕은 그것을 경장하려고 송인명(宋寅明), 조현명(趙顯命), 원경하(元景夏) 등 신하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두 제도를 폐지하였다는 것이다. 이 조치는 당쟁을 혐오하고 탕평을 하려는 영조의 의지가 보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를 계기로 왕권을 강화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한림 회천을 혁파한 것에 대하여, 연암 박지원은 사관이라는 자리가 양반사대부들의 맑은 벼슬자리로 매우 중하게 여겼는데, 사관 추천 제도가 크게 변하여 한림의 중요성이 상실되었다고 개탄하였다. 우리나라가 세워진지 오래되어서 사대부들이 오로지 문벌만 숭상하는데, 그 문벌들의 맑은 벼슬자리[淸宦]로는 한림과 이조 좌랑을 더욱 중하게 여겼다. 이조의 정랑과 좌랑은 3품 이하의 관원에 대해서 통색(通塞)을 모두 주관하고 또 자기 후임도 스스로 추천한다. 그러나 그 이름과 지위는 하급 관원인 낭서(郞署)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데 한림의 관례에는 회천(回薦)이 대문에 이르러 예문관 하인이 고사에 따라, “자리에 계신 분들은 회피하셔야 하겠습니다.” 라고 아뢰면, 아무리 대관(大官)이라도 전에 검열을 지낸 사람이 아니면 으레 다 자리를 피하여 떠나야 한다. 선발에 든 사람이 문벌과 재학(才學)에 털끝만큼의 하자도 지적되지 않은 다음에야 비로소 완천(完薦)이 되었다. 완천한 날에는 분향하고 맹세하기를, “제대로 되지 않은 사람을 추천하였다면 재앙이 자손에게까지 미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이것은 사관의 일을 중히 여긴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벼슬 품계는 비록 낮으나 어디에도 통제되고 소속되지 않았으니, 이조의 정랑과 좌랑에 비해서도 그 이름이 더욱 화려하고 돋보였다.(『연암집』 권3 孔雀館文稿 王考手書翰林薦記) 조선의 명문세가에서는 맑은 관직을 좋아했고 그 맑은 관직 중에서도 한림과 전랑이 가장 중요하였다는 것이다. 한림은 검열, 봉교, 대교 등 전임 사관을 말하는 것이고 전랑은 문반의 인사권과 자신의 후임을 임명하는 권한인 자대권(自代權)까지 가지고 있는 이조의 정랑과 좌랑을 말하는 것이다. 검열은 4원, 이조 정랑, 좌랑은 각 3원이었다. 모두 10자리에 지나지 않는 관직이 조선 엘리트들이 가장 선망하는 자리라는 것이다. 연암(燕巖)은 전랑보다도 오히려 한림 자리를 더 높게 보았다. 그래서 사관 임명의 전례에 따라서, 후임 한림을 추천하기 위한 회천이 예문관에 오게 되면 비록 고위 관료라도 그 자리를 피해줘야 하고, 추천은 문벌이나 재주, 학식이 하나도 흠이 없는 사람이어야지 완천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완천은 추천권자 모든 사람의 동의를 의미하는 것으로 한 사람이라도 반대가 있으면 안되었다. 그래서 완천하는 날에는 분향을 하고 하늘에 맹서를 하는 의식을 한다는 것이다. 검열은 정9품, 대교는 정8품, 봉교는 정7품에 지나지 않은 하급 관직이다. 이조 정랑은 정5품, 이조 좌랑은 정6품으로 문반 인사권과 자대권까지 있는 이른바 전랑(銓郞)도 당하관인 것은 마찬가지이다. 전랑 자리를 둘러싸고 당쟁이 일어났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신진 기예의 젊은 그룹들과 삼공육경으로 대표되는 2품 이상의 노성한 대신들이 서로 견제와 균형을 이룬 가운데 조선 왕조의 왕권이 안정된 국가 경영을 할 수 있었다고 하였다. 당쟁의 핵심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남인인 이중환(1690~1752)과 노론인 박지원(1737~1805)의 전랑과 한림에 대한 이해는 같은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이중환이 두 제도 혁파 이후에 태어났어도 전랑과 한림을 보는 입장은 박지원과 같았을 것이다. 전랑 통청제와 한림 회천제가 신진 관료들이 노성한 원로나 국왕의 탕평책을 제대로 따르지 않는 나쁜 제도라는 이유로 당시의 탕평파 관료들과 영조에 의하여 한림 회천제가 폐지되고 한림 권점제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한림 회천제가 절대 평가라고 한다면 한림 권점제는 상대 평가라고 할 수 있다. 한림 회천에서는 한 사람이라도 선배 사관이 반대를 하면 완천이 되지 않는 데, 한림 권점(권점이란 동그라미 점이라는 의미로 찬반 투표를 말한다)은 다수의 유자격자 가운데에서 선배 사관이 권점을 하고 원로 대신들이 권점을 하여 다수의 지지를 받은 순서대로 한림에 임용이 되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나은 사람을 한림에 임명하는 상대 평가 제도라고 할 수 있다. 한림 회천을 한림 소시(召試)로 바꾸고, 전랑을 일반 관리로 만들어 버려서 사대부들이 부귀영달하는 길로만 치달리게 되었고, 조선 왕조 300년 동안 사대부의 기상을 함양하던 제도가 모두 없어져 버리고 말았다고 연암 박지원은 개탄하였다. 사관이 사초를 맡는 중책을 맡고 있는 데도 하늘에 분향하고 맹세하는 말은 없어져 버렸다는 것이다. 앞에 소개한 사관 취재 춘추관 문서는 물론 한림 회천법이 시행될 때의 문서들이다. 회천법이 폐지된 이후에도 한림을 시험하여 선발하는 시험 제도는 계속되었다. 글쓴이 김현영(金炫榮) 한국고문서학회 명예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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