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의 기억] 천 명 가까운 목숨을 앗아간 조선시대 최악의 해난사고 게시기간 : 2020-04-11 07:00부터 2030-12-17 21:21까지 등록일 : 2020-04-09 14:58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풍경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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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남 우수영 추조(秋操) 패선(敗船) 사고 태풍이 쓸고 간 자리, 천 명 가까운 수군들이 죽다. 지금으로부터 364년 전인 1656년(효종 7) 8월 15일(음력), 전남도1) 우수영 앞바다에서 수군 천여 명이 물에 빠져 죽는[渰死] 엄청난 참사가 일어났다. 이에 대해 전남감사 조계원(趙啓遠)이 아뢰기를, “전남 우수사 이익달(李益達)이 여러 고을의 전선(戰船)을 통솔하여 바다로 나가 수군을 조련시키던 중, 갑자기 비바람이 크게 일어났습니다. 이 때문에 훈련 중이던 금성(錦城)·영암·무장·함평·강진·부안·진도 등 고을의 전선들이 모두 떠내려가거나 침몰되었습니다. 이에 죽은 수졸(水卒)이 1천여 인이나 되었습니다. 진도군수 이태형(李泰亨)도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효종은 “지금 이 보고를 듣고 하루 내내 서글퍼 가슴을 진정시킬 수가 없구나. 전남도에 영을 내려 특별히 휼전(恤典, 정부에서 이재민을 구제하는 은전)을 시행하도록 하고, 수사 이익달과 우후 신숙(辛淑)은 함께 잡아다 국문하도록 하라.” 라고 지시하였다.2) 한꺼번에 천여 명의 수군들이 물에 빠져 죽는 대참사가 일어났으니 심히 놀랄 만한 일이었다. 9월 4일에는 전남도에 선유어사(宣諭御史) 홍주삼(洪柱三)을 보내 물에 빠져 죽은 선졸(船卒)들을 위한 초혼제를 해변에서 지내게 하고 휼전을 베풀게 하였다.3) 서남의 풍재[西南風災]로 불렸던4) 이 사건 당시에 불었던 바람은 구풍(颶風)이라고도 했는데, 바다를 흔들어 배를 뒤집을 정도의 매우 강한 태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번의 변고는 막중한 재해로 역사서에도 나타난 기록이 없고 듣지도 못한 것입니다. 동래에서 시작하여 진도에서 끝을 내고, … 호남의 전선이 패몰된 것이 13척에 이르며, 그 나머지 병선과 협선(挾船)도 파손된 것이 그 숫자가 얼마인지 모릅니다.” 라고 했다. 사서(司書) 민유중(閔維重)이 태풍 피해를 종합하여 보고한 기록에 따르면 “사나운 바람이 갑자기 일어 가옥을 무너뜨리고 들판을 진동시키고 인물(人物)이 날렸다고 말한 것도 있고, 우박이 갑자기 내려 백성이 죽거나 다친 이가 백여 명이라고 말한 것도 있고, 큰 비로 강물이 불어 농민이 빠져 죽은 자가 40여 명이라고 말한 것도 있으며, 밭에 쌓아둔 곡식이 저절로 발생한 화재로 모두 탔다고 말한 것도 있고, 심지어 천둥이 치고 바람이 불며 벼락이 쳐서 성묘(聖廟)가 무너지고 부서졌으며, 방파제가 무너지고 주사(舟師)가 떠내려가 실종되었는데 그 동안에 목숨을 잃은 자를 따져보면 이미 수천여 명에 이른다고까지 하였습니다.”5) 라 하였다. 이어서 “실로 지난 역사에 없었던 바이고 국조(國朝) 3백 년간 듣지 못했던 바”라고 하는데서 얼마나 강한 태풍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듯하다. 천 명 가까운 수군들이 죄 없이 죽어 곳곳에서 고아와 과부들의 원통한 부르짖음이 하늘에 사무치는 지경이었다. 더구나 사고가 난 날은 8월 15일 바로 대보름달이 뜨던 추석날이었으니 가족들의 슬픔은 더욱 컸을 것이다. 이때 창원 등지에서도 추조(秋操)를 거행하다가, 전남도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역시 전선이 치패하여 엄사(渰死)한 자들이 많았다. 이들에게도 휼전을 베풀도록 조치하였다.
추조(秋操)란 무엇인가? 수군을 훈련시키는 일을 수조(水操)라 하였다.6) 수조는 전시를 대비하여 해상에서 이루어지는 수군의 군사훈련을 말한다. 조선후기에 수조는 각 도(道)의 수군절도사가 주관하는 ‘도 수조’와 통제사·통어사가7) 주관하는 ‘합조(合操)’가 있었다. ‘도 수조’는 수군절도사가 예하 읍, 진의 수군과 군선을 징발하여 그 도의 앞바다에서 실시하는 것이었고, ‘합조’란 통제사가 경상·전라·충청도의 수군을, 통어사가 경기·황해·충청도의 수군을 각각 훈련하는 것이었다. 합조의 실시는 이전의 진관(鎭管)체제에서 벗어난 새로운 방어 전략에서 나온 것이었다. 합조는 1660년(현종 1) 이전 어느 시기부터는 시행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수조는 봄, 가을로 1년에 2번 시행되었는데 2월 봄에는 ‘합조’를, 8월 가을에는 각도의 앞 바다에서 실시하는 ‘도 수조’를 실시하는 게 관례였다. 8월 ‘도 수조’가 이번 사고가 난 ‘추조(秋操)’ 곧 가을 훈련이었다. 최초의 수조는 조선 초 태종과 세종이 한강변에 친히 나아가 각각 거북선의 훈련 모습과 새로 만든 군선의 성능을 관람하는 형식으로 시행한 것을 들 수 있다. 이후 규모와 형식에서 보다 발전하였다. 조선후기 수조에 관한 기록은 1621년(광해 13)에 보인다. 이를 통해 임진왜란 직후부터 수조가 시행되었다는 것과, 그 규모가 도 전체의 선박을 망라하는 대규모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수조는 기근이 들거나 기타 사정에 따라 수시로 장소를 바꾸거나 중지하기도 하였다.
자연재해인가? 인재인가? 사고 소식을 듣고 효종은 국문을 지시하였고, 이에 따라 이익달을 붙잡아 와 추국하였다. 아무래도 책임 소재를 가누어야 했다. 이때 문제는 이 사고가 자연재해로 인한 불가항력적인 풍재(風災)였느냐? 아니면 전남 우수사 이익달의 불찰로 인한 인재(人災)였느냐? 이중 어느 것이냐를 정하는 게 관건이었다. 효종이 먼저 “뱃사람들은 바람의 기후를 미리 알았을 텐데 어찌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라 하여 인재의 가능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였다. 그러자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수사 이익달이 아랫사람의 말을 듣지 않은 까닭”이라고 답하여 그 책임을 수사에게 돌렸고, 이조판서 윤강(尹絳)도 “주장(主將) 즉 수사의 죄가 없을 수 없다.”고 하여 이를 거들었다.8) 요즘 같았으면 이 정도의 태풍이라면 일기예보를 통해 충분히 일찍 알아 대비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물론 그렇지 못했다. 같은 시기에 창원 등지에서도 훈련 중 패선 사고가 있었고, 또 지난 역사에 없던 역대급 태풍이었다는 기록들로 미루어 볼 때 자연재해인 편이 더 컸다. 자연재해라면 이익달에게 죄를 묻기는 어려웠다. 그래도 누군가에게는 책임을 묻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기록이 없어 경과가 분명치는 않으나 군률에 의한 처벌은 면하고, 은혜롭게 서용하라는 은서(恩叙)의 명을 받았다. 그리고 현종 대에 당상(堂上) 선전관(宣傳官)에 제수되었다. 하지만 “시기를 골라 잘 진행하지 못했던 관계로 1천 명 가까운 수군[近千水軍]9)이 모두 물에 빠져 죽”10)은 데 대한 책임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다. 사간원의 파직 요청에 결국 체차(遞差)되었다. 여전히 인재라는 주장이 강하였다. 대사간 김수항(金壽恒) 등도 “주사(舟師)를 조련하던 날 뭇사람들 뜻을 거스르고 어리석고 망령되이 제멋대로 하다가 결국 1천 명 가까운 군졸을 일시에 빠져죽게 만들었으므로, 호남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그를 원망하며 꾸짖고 있습니다.”라 하여 인재에 힘을 실었다. 이익달은 홍주영장, 창주첨사(昌洲僉使) 등을 역임하는데 사실 수사였던 이익달의 입장에서 보면, 수사 아랫자리인 영장이나 첨사에 가는 것만 해도 수모인데 그것마저도 맡기 어려운 수난을 당하였던 것이다. 추조 패선 사고로 인하여 이익달의 거취 문제는 내내 논란거리가 되었다. 그러다가 1662년(현종 3) 2월 대사간 서필원(徐必遠)이 아뢰기를, “이익달이 배를 침몰시킨 일에 대해 대론(臺論)이 준엄하게 발동되어 다시 죄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신이 그때 본도의 감사로 있으면서 해변에 사는 사람들의 말을 상세히 들었는데, 그 일은 실로 갑자기 풍랑이 일어난 데에 기인한 것으로서 사람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지금 와서 추죄(追罪)한다면 억울한 일이 될 듯싶습니다.” 라 하였고, 승지 김시진도 “당초 그를 죽였다면 모르지만, 지금 와서 추죄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라 하였다. 서필원은 1658년(효종 9) 8월부터 전남감사를 지냈기 때문에 당시 사정을 현지에서 비교적 잘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런 그가 대사간에 있으면서 이 사건을 인재보다는 자연재해 쪽에 무게를 두는 발언을 함으로써 추조 해난사고는 자연재해로 결론이 났다. 그리고 이익달에게는 출사가 하락되었다. 인재냐 자연재해냐는 논란은 이 정도에서 자연재해, 즉 풍재로 끝이 났다. 그렇다고 이익달이 자유로워 진 것은 아니었다. 1665년(현종 6) 11월에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영흥부사(永興府使) 이익달은 죄루(罪累) 때문에 오랫동안 폐기되었던 사람인데 본직에 제수됨에 이르러서는 정사(政事)에 볼 만한 것이 없음은 물론 몰래 읍비(邑婢)와 간통하다가 기운이 손상되어 병이 생긴 탓으로 관사(官事)를 폐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민생의 원고(怨苦)가 날로 더욱 극심하니, 이익달을 파직시키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였으나, 왕이 윤허하지 않았다. 잇따라 5일 동안 아뢴 다음에야 따랐다.11) 이처럼 끈질기게 이익달에 대한 서용 반대 움직임은 이어졌다. 해난사고는 자연재해로 결론이 났기 때문에 서용의 문제를 더 이상 제기하기 어렵자, 이번에는 무능, 읍비와의 간통 등을 이유로 파직을 청하였던 것이다. 이때는 사고가 난지 9년이 지난 후였다. 그만큼 해난사고가 컸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천 명 가까운 수군들이 수장된 엄청난 대참사였기 때문에 용서받기가 결코 쉽지 않았던 것이다.
세월호 6주기에 다시 보는 해난사고 이 추조 패선 사고에 대하여는 조선정부에서는 국가 차원의 추모제를 지냈다. 앞서 본 것처럼 사고 직후에는 선유어사를 보내 초혼제를 지내게 하였다.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1662년(현종 4) 4월에 전 만호(萬戶) 한집(韓緝)이 군사들이 전쟁으로 죽은 곳에 제사 지내 줄 것을 청하는 상소가 있었고, 이에 응하여 현종이 의주·강화·금화(金化)·광주(廣州)·안주(安州)·토산(兎山)·안변(安邊) 등의 병자호란 전쟁터와 호남의 수상 조련 때에 큰 바람으로 인하여 사람이 빠져 죽은 곳에 향과 축문을 내려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12) 우수영 가을 훈련 때의 해난사고는 그만큼 충격적인 사건이었다.13) 지난 2016년 10월 해남 우수영유스호스텔에서 전라우수영민속예술촌위원회와 해군3함대사령부가 공동으로 360년 전, 전라우수영 수군 천명의 숭고한 희생을 추모하는 행사를 처음으로 가졌다. 국가 차원의 추모제는 아니었지만, 그나마 잊지 않고 있어 다행이었다. 올 4월 16일이면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벌써 6주기가 된다. 진도 인근이라면 추조 패선사고가 일어났던 우수영 앞 바다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국가를 지키기 위한 군사훈련 도중 맞은 천 명 가까운 수군들의 숭고한 희생을 되새기면서 아울러 세월호 참사의 아픈 기억과 함께 안타까운 희생자들의 명복을 손 모아 빌어본다. 1) 1645년(인조 23)에 나주의 주리(州吏) 양한룡(梁漢龍) 등이 목사 이갱생(李更生)을 칼로 찔러 중상을 입히는 사건이 일어났다. 정부에서는 이에 대한 책임을 물어 나주의 칭호를 강등시켜 금성(錦城)이라 하였고 전라도도 나주 대신 남원을 넣어 전남도(全南道)로 이름을 바꾸었다. 패선 사고가 났을 때는 전라도가 아니라 전남도에 해당하는 시기였다.
2) 『효종실록』 17권, 효종 7년 8월 27일 임인 1번째 기사 3) 『효종실록』 17권, 효종 7년 9월 4일 기유 2번째 기사; 『국역비변사등록』18책, 효종 7년 9월 5일 4) 『효종실록』 17권, 효종 7년 9월 3일 무신 1번째 기사 5) 『효종실록』 17권, 효종 7년 9월 19일 갑자 2번째 기사 6) 수조에 대하여는 李敏雄, 「17∼8세기 水操 運營의 一例 考察」(『軍史』38, 1999. 10,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박정주, 「조선시대 수조(水操)에 대한 시론적 고찰」(『동북아시아문화학회 국제학술대회 발표자료집』, 2016.10, 동북아시아문화학회) 참조. 7) 임진왜란 때인 1593년(선조 26) 전라도·경상도·충청도 수군을 통괄하는 삼도수군통제사를 설치하고 통제영을 두어 3남 수군의 지휘계통을 일원화하였다. 또 1627년(인조 5) 이후 경기지역 해안의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경기도·황해도·충청도 수군을 통할하도록 삼도수군통어영을 설치하였다. 통어영의 우두머리가 통어사였다. 8) 『승정원일기』 효종 7년 8월 29일 “上曰, 船人預知風候, 而何以致此也。太和曰, 是官員, 不聽下輩之言故也。尹絳曰, 主將不得無罪。太和曰, 敗船時, 格卒軍人渰死甚多, 而珍島郡守李泰馨, 有老父在, 亦甚惻矣” 9) 사고 직후 죽은 수졸의 숫자는 ‘천여 명’으로 보고되었다. 그 후 “1천명 가까운 군졸[近千水軍]”로 표현이 바뀌었다. 『전라우수영지(全羅右水營誌)』(충무공명량대첩유적사업회, 1995)에 수록된 『우수영선생안(右水營先生案)』에 따르면, 이익달의 후임인 변급(邊岌)의 행적 기록에 “渰死人命 六百九十七名”이라 하여 697명으로 집계되어 있다. 그리고 영암 대장(代將) 최홍철(崔弘澈)도 그때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10) 『현종실록』 1권, 현종 즉위년 12월 25일 신해 3번째 기사 “當水操時, 不能相時善處, 致令近千水軍, 一時渰死” 11) 『현종실록』 11권, 현종 6년 11월 8일 경인 1번째 기사 12) 『비변사등록』 현종 3년 4월 1일, 『현종실록』 1권, 현종 대왕 행장(行狀) 13) 그밖에도 해상훈련 때에는 크고 작은 사고가 있었다. 예를 들면, 1716년(숙종 42) 전라도 흥양현(興陽縣)과 여도진(呂島鎭)에서도 사고가 있었는데, 습조(習操)하러 나간 수영(水營)의 배가 바다 가운데에서 패몰하여 죽은 군사가 59명이었다. 글쓴이 고석규 목포대학교 前 총장, 사학과 명예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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