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家別傳] 9산선문 최초 가람 지리산 실상사에서 편운(片雲) 스님을 기린다 게시기간 : 2020-04-21 07:00부터 2030-12-24 21:00까지 등록일 : 2020-04-20 09:57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佛家別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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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실상사는 “마음의 고향, 사상의 고향”이다 남원 지리산 실상사는 “마음의 고향, 사상의 고향” 같은 절집이다. 3학기 교양과정부를 거쳐 대학 2학년 2학기에 드디어 전공학과에 배정되었다. 학과에 들어가자 마자 9월 첫 답사로 남원지역 월례답사를 가게 된 것이다. 남원의 광한루와 실상사 고적답사였다. 스쿨버스 황금마차를 타고 광원루를 살피고 실상사에 가는 일정이었다. 함양으로 가는 길 중간에 버스에서 내려 실상사가 있는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 냇가에 놓여진 큰 돌 징검다리를 딛고 건너가야 절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때가 1970년대 후반이었다. 1980년대 초반에 큰 홍수로 인해 돌징검다리가 떠내려 가버리게 되자, 절 앞 냇가를 연결하는 시멘트 다리가 새로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후에는 승용차를 타고 실상사에 쉽고 편하게 갈 수 있게 되었다. 1970년대 후반 첫 고적답사 당시에는 징검다리를 건너뛰어 절에 들어가 인솔하시는 선생님의 설명을 들었다. 실상사철조여래좌상(보물 제41호) 앞에서 낮은 목소리로 차분하게 설명하시던 선생님의 음성이 내 귀에 생생하다. 통일신라의 9세기 초중반에 걸친 중국 남종선의 전래 및 신라 사회에서의 수용과 9산선문의 하나인 실상산문의 개창에 관한 선생님의 말씀을 온전하게 이해하게 된 것은 1980년 한국 불교사에 뜻을 두고 선종 사상사를 공부하면서 비로소 조금씩 가능하게 되었다. 지금 내 공부의 연원이랄지, 그 시작된 시점을 살핀다면 이 시기에 두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하여 실상사는 나의 공부의 시작에 있어서 “마음의 고향”이요, 한국선종사에 있어서는 “사상의 고향”이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1. 실상사 철조여래좌상 2. 북산의(北山義) 남악척(南岳陟) 북산 설악산의 도의(道義)와 남악 지리산의 홍척(洪陟) 스님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것은 문경 봉암사에 있는 신라말의 대학자 최치원이 893년(진성여왕 7) 무렵에 찬술한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국보 제135호)에 쓰여진 글이다. 지증대사(智證大師) 도헌(道憲)을 현창하기 위해 찬술된 비문인데, 최치원의 「사산비명(四山碑銘)」 중의 하나로서 남종선(南宗禪)의 전래와 구산선문(九山禪門)의 개창에 관한 기록을 포함한 한국고대불교사를 요령있게 잘 정리해 놓은 명문이다. “북산의(北山義) 남악척(南岳陟)”이란 말은 신라하대 초기선종의 형세를 잘 표현한 말이다. 북쪽에는 설악산의 진전사에 머문 도의가, 남쪽 지리산의 실상사에 주석한 홍척이 선풍을 크게 드날렸음을 단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도의는 821년(헌덕왕 13) 당나라 서당지장의 선법(禪法)을 이어받아 신라에 최초로 남종선을 전한 선종 승려였다. 그는 중국 남종선을 그대로 전하여 설법하였기 때문에 화엄종 중심의 신라 사회에 수용되지 못하고 배척을 당해 설악산 진전사에 은거하여 염거화상에게 법을 전하였고, 또한 염거는 그 법을 체징에게 전하였다. 체징이 장흥 보림사를 근본도량으로 하여 가지산문을 비로소 개창함으로써 도의의 선법을 고양하여 신라선종의 초조(初祖)로 내세우게 되었다. 이러한 남종선을 신라에 처음 전한 도의가 설악산에서 선법을 일으키는 상황을 최치원은 ‘북산의(北山義)’로 표현한 것이다. 홍척은 도의보다 5년 뒤인 826년(흥덕왕 원년)에 앞의 도의와 같은 당나라의 서당지장의 선법을 받아 귀국하였다. 그는 즉위하면서 개혁정치를 표방한 당시 국왕인 흥덕왕과 선강태자 충공의 귀의를 받아 남원경의 지리산 실상사를 근본도랑으로 하여 실상산문을 개창하게 되었다. 홍척의 실상산문은 9세기 초반 신라사회에 최초로 설립된 선종가람 실상사에서 시작된 것으로 실로 한국불교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으로 역사적 의의가 적지않은 것이었다. 실상사를 중심도량으로 한 지리산권에서 선풍을 크게 떨친 홍척의 선풍을 최치원은 남악척(南岳陟)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와 같이 가지산문의 도의와 실상산문의 홍척은 9세기 신라사회에 선종이 수용되는 단계에서 쌍벽을 이루는 존재였던 것이다. 3. 실상산문의 분지화(分枝化) 홍척의 실상산문의 선법은 사자사승(師資相承)으로 제자에게 이어졌다. 홍척 문하에는 뛰어난 제자로 수철화상과 편운화상이 있어 실상산문의 선법의 법등이 이어졌다. 실상산문은 개창 당시에 흥덕왕과 선강태자 충공의 귀의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신라 왕실과 돈독하게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다. 이러한 왕실과의 결연은 홍척에 이어 제자 단계인 수철이나 편운에게도 그대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10세기 무렵의 남원지역을 둘러싼 정치 세력의 역학관계는 미묘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러한 지역사회의 분위기가 실상산문 내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홍척이 개창한 실상산문이 수철계와 편운계료 분지화(分枝化)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하였던 것이다. 신라 왕실과 결연된 수철계와 남원지역에 새롭게 세력을 뻗친 후백제의 견훤 세력과 결연된 편운계로 나뉘게 된 것이다. 홍척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사형사제로서 같은 동문이지만, 당시의 지역사회의 현실이 불가피하게 사찰에도 영향을 미쳐 후원자인 단월세력을 달리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2. 남원실상사 증각대사 승탑
3. 남원실상사 수철화상 승탑 이러한 정황이 담겨진 유물이 실상사 극락전을 중심으로 한 증각홍척과 수철화상의 승탑과 탑비이고, 이와 다르게 조계암지에 따로 세워진 편운화상의 승탑이다. 홍척에서 수철로 이어지는 계통에서는 극락전 구역을 중심으로 해서 사승(師僧)의 추모공간을 조성하였다. 신라 왕실과 결연된 증각국사 홍척과 수철화상에게는 입적(入寂) 후 국가에서 시호와 탑호를 하사하고 국가적 사업으로 승탑과 비를 건립하게 하였다. 보물 제38호로 지정된 홍척국사의 ‘증각대사응료탑’과 보물 제33호로 지정된 수철화상의 ‘수철화상능가보월탑’은 8각원당형의 완전한 형식을 갖춘 전형적인 신라 시대의 부도(승탑)임에 틀림이 없다. 편운계에서는 오늘날 실상사에서 약수암으로 올라가는 초입에 있는 조계암터를 중심으로 사승(師僧) 편운(片雲) 화상의 승탑을 조성했다. 수철계 문도들과 편운계 문도들은 사승의 승탑을 별도구역에 조성했을 뿐만 아니라, 승탑의 양식에 있어서도 서로 판이하게 다르게 조성했다. 수철계 문도들은 증각홍척의 승탑과 같은 팔각원당형으로 조성했으나, 편운계 문도들은 당시 성행하던 팔각원당형과는 다른 크기도 왜소하고 형식도 단순한 것이었다. 삿갓을 쒸운 형태에 둥그런 원구를 받치고 그 아래에 네모난 받침돌을 놓은 형태의 독특한 승탑을 조성하고 가운데에 승탑의 주인공이 누구임을 밝히면서 관련사실과 건립시기까지 새겨놓고 있음이 주목이 된다. 후대에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로 충분하다고 느껴진다. 편운화상 승탑의 탑신의 정면에 새겨진 글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4. 남원실상사 편운화상 승탑 성주(星州)에 안봉사(安峰寺)를 창건한 편운화상은 입적 직후 910년 실상사에서 그의 문도들이 스님을 기려 부도를 세운 것이다. 당시 남원 지역은 서기 900년에 완산주(전주)에 도읍을 정하고 바른정치를 표방하는 견훤의 후백제의 영역이었다. 편운화상 승탑(부도)에 “정개 10년 경오년에 세우다”라는 명문으로 미루어보면, 이때 편운계의 실상산문은 후백제의 건국을 기정사실로 인정하고 이에 적극 협조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상산문의 편운계는 후백제의 견훤세력과 결연된 선종불교세력이었다고 파악된다. 4. 사실은 우리도 편운(片雲)이다. 편운은 편운 스님의 자호(自號)이지 않은가 한다. 생사를 한 조각 뜬구름으로 여긴 스님으로 살았기 때문에 스스로를 편운화상이라고 하였지 않았나 한다. 사승(師僧)의 자호(自號)를 제자들이 승탑에 새겨넣은 것으로 보인다. 불가에 이런 말이 전한다. 요즘 49재를 지낼 때 자주 듣게 되는 구절이다. 생이란 한 조각 뜬 구름이 일어나는 것이며 죽음이란 한 조각 뜬 구름이 사라지는 것이다. 태어나고 죽고 오고 감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후략) 생사가 한 조각 뜬 구름이라는 것이다. 우리네 인생사가 다름 아닌 한 조각 든 구름 아닌 것이 없다는 것이다. 서로 날카롭게 대립각을 세우며 살아가는 중생들의 현실 세계에서 한마음 돌려 생각해 보면 허망하기 그지없는 것이 우리 인생사이다. 우리가 한 조각 뜬구름임을 자각하고, 서로 배려하고, 감사하며 살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우리가 편운(片雲, 조각구름)인 것이다. 글쓴이 이계표 전라남도 문화재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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