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서와 옛편지] 율곡의 붓 아래 완전한 사람 없다, 가장 사초(家藏史草) 게시기간 : 2020-04-23 07:00부터 2030-12-17 21:21까지 등록일 : 2020-04-22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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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와 옛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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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의 가장 사초, 『석담일기(石潭日記)』 매천 황현은 재야의 선비이지만, 『매천야록(梅泉野錄)』과 『오하기문(梧下記聞)』 등 당대에 직접 견문한 일들을 기록하여 근대사를 기록하였다. 매천은 사관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에 못지않은 필봉을 휘둘러 ‘매천의 붓 아래 완전한 사람은 없다[梅泉筆下無完人]’는 말을 들었다. 우리나라의 근대에 해당하는 시기인 고종, 순종 대에는 정사인 『고종실록』, 『순종실록』이 있으나 이 두 실록은 일제 강점기에 이왕직(李王職)이라는 총독부 기구에 의하여 편찬된 것이기 때문에 편년 기록 이상의 역사서로서의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그래서 해방 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사료집을 편찬할 때에 첫 번째로 간행한 사료총서 제1집이 『매천야록』이고 『매천야록』의 시각은 우리나라 근대사의 하나의 기준이 되었다. 매천의 필봉이 날카롭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사필에 의하여 인물이나 사건을 평가하는 것은 전근대 사관의 임무였다. 율곡 이이는 1565년(명종 20) 7월부터 시작하여 1581년(선조 14) 11월까지 15년 이상의 사초를 정리하여 일기 자료를 남겼는데, 그것이 바로 『석담일기』이다. 『석담일기』의 원래의 표제는 『경연일기』라고 되어 있고, 내제(內題)는 ‘금상실록(今上實錄)’이라고 되어 있었다고 한다. 율곡은 전임 사관의 직책인 검열이나 봉교, 대교의 직임을 가지지는 않았기 때문에 ‘가장 사초’를 남기지는 않았으나, 29세에 문과에 합격하여 관직에 나간 이후, 사간원의 정언이나 사헌부 지평, 홍문관 교리, 이조 좌랑 등 청요직을 역임하면서 겸사관(兼史官)의 직책을 가지고 있었고, 또는 경연관으로 참여하면서 사초를 써서 남겼다. 『석담일기』에는 각 사건이나 인사에 대해서 날짜순으로 기록하면서 각 사건, 인사에 대해서 ‘삼가 생각건대[謹按]’로 시작하는 자신의 사평(史評)을 달았다. 이 사초가 실록으로 편찬될 때에는 ‘사신은 말한다[史臣曰]’로 시작하는 사평이 된다. 율곡의 사평은 매우 가혹하여, 조광조나 이황, 성혼 등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의 이준경, 노수신, 허엽 등 동시대 인물들의 의리나 처세, 학문의 문제점에 대해서 날카로운 비판과 지적을 하였다. 기대승의 졸기(卒記) 부분에서도 최영경의 비판을 인용하여 비판하였다. 여기에서 ‘율곡의 붓 아래 완전한 사람 없다[栗谷筆下無完人]’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시정기(時政記), 승정원일기와 가장 사초 사초는 모든 역사 자료의 초고를 말한다. 조선시대에는 사초와 관련된 사건들이 많았다. 김일손이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인용함으로써 빚어진 무오년의 사화는 ‘사화(士禍)’이지만 사초로 인해서 빚어진 사화이기 때문에 ‘사화(史禍)’라고도 하였다. 그런데 사초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엄격히 규정하자면 조선시대의 사관 제도와 관련해서 살펴보지 않을 수가 없다. 사초는 사관들이 당대의 역사 편찬을 위하여 준비해두는 기록이다. 이를 전담하는 관직이 사관이다. 사관의 정원은 예문관의 검열 4원(정9품), 봉교 2원(정8품), 대교 2원(정7품) 모두 8원(員)이다. 규정에는 8원이지만 보통 3~4명의 현임 사관들이 있을 뿐이다. 이들은 국왕의 모든 언동을 기록한다. 이것을 사초라고 한다. 사관은 하루에 한 권씩 휴대하기에 적합하도록 지금 크기로는 B5나 A5 정도의 조그만 공책을 만들어 국왕의 측근에서 기록하는 데, 그것을 초책(草冊)이라고 하였다. 이 초책을 정리하여 뒤에 실록 편찬의 기초 자료가 되는 「시정기(時政記)」를 만든다. 따라서 이러한 초책들은 「시정기 초책」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시정기 초책」으로 지금 남아있는 자료는 사관 박태유(朴泰維, 1648∼1746)가 기록한 「박태유 사초」(장서각 소장, 그림1)와 허적(許積, 1610~1680)이 기록한 「인조무인사초(仁祖戊寅史草)」(규장각 소장, 그림2)이다.
그림1-1 시정기 초책(박태유)1
그림1-2 시정기 초책(박태유)2
그림2-1 시정기 초책(허적)1
그림2-2 시정기 초책(허적)2 이러한 전임 사관 외에 또 국왕의 역사를 기록하는 직책이 있었으니 그것은 승정원의 주서(注書)이다. 주서도 정9품의 하급 관원이지만 전임 사관인 예문관 검열과 마찬가지로 국왕의 기록을 맡아서 하고 있다. 이들도 적은 인원이지만 국왕의 언동을 빠짐없이 맡아서 기록하였다. 주서가 국왕의 언동을 기록한 것은 뒤에 『승정원일기』로 만들어져 보관되니 「승정원일기 초책(草冊)」이라고 한다. 「승정원일기 초책」으로는 이담명(李聃命)의 「승정원사초(承政院史草)」(서울역사박물관 소장, 그림3)가 있다.
그림3-1 승정원일기 초책(이담명)1
그림3-2 승정원일기 초책(이담명)2 실록 편찬의 기초 자료가 되는 「시정기」와 『승정원일기』 외에도 특별한 사초가 또 하나 있으니 그것은 바로 ‘가장 사초’이다. 사관을 역임한 사람들은 시정기를 편찬하고 거기에 더해서 여러 가지 인사나 사건에 대해서 사관의 평가를 하였다. 그것을 사평(史評) 또는 사론(史論)이라고 하는데, 실록에서는 ‘사신 왈(史臣曰)’이라고 하여 어떤 인사나 사건 기사 뒤에 첨부되었다. 국왕의 정치 행위에 대해서도 숨김없이 사평을 가하였다. 그러다보니 자신과 정치적 이념을 달리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가혹한 평이 따르게 되고 자기와 같은 당여에 대해서는 비호를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사관을 선임하는 한림을 추천하는 과정에는 완천(完薦)을 거쳐서 하늘에 맹세를 하는 분향 의식을 거행하기도 한 것이다. 가장 사초와 사평, ‘사신은 말한다[史臣曰]’ 가장 사초는 한 임금이 죽으면 설치되는 실록청에 제출되어 시정기나 승정원일기와 함께 편찬 자료가 되었다. 가장 사초에는 물론 사평이 붙어 있기 때문에 정치적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사람들이 보게 되면 매우 위험한 것이기도 하다. 필자가 조사한 바로는 사관 당사자가 쓴 가장 사초는 현재 3건 정도 남아있다. 무덤에 함께 부장되었다가 묘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출토된 인조 대의 사관 정태제(鄭泰齊)의 『사초(史草)』(그림4), 영조 대에 사관을 한 윤동승(尹東昇)의 『한간비초(汗簡秘草)』(그림5), 김몽화(金夢華)의 『비사(秘史)』(그림6)가 그것이다. 각 사초의 제목은 가장 사초를 정리한 사관이 임의로 붙인 것이다. 모두 개인 소장이다. 이 가장 사초들의 특징은 앞에 말한 것처럼 각 사건을 기록하고 그 뒤에 자신의 견해를 표명한 사평이 실려 있다는 것이다. 하나하나의 사건에 대해서 이들이 어떠한 입장을 가지고 있는지 꼼꼼히 들여다보면 무척 재미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림4-1 정태제, 사초1
그림4-2 정태제, 사초2
그림5-1 윤동승, 한간비초1
그림5-2 윤동승, 한간비초2
그림6-1 김몽화, 비사1
그림6-2 김몽화, 비사2 실록에는 얼마나 많은 사평이 실려있는가? 실록에서 사관의 사평인 ‘사신 왈’로 검색을 하면 아래 표와 같이 무려 5천 4백여 건의 기사가 검색된다. 조선 왕조 518년에서 정조실록 이후 ‘사신 왈’이 없는 기간 134년을 제외하면 384년간 연평균 14,1건 이상의 사평이 이루어졌다. 또 아직 사관에 의한 사평이 정착되기 이전인 조선 초기 43년 정도를 빼면 341년간 연평균 15.9건의 사평이 이루어지고 있다. 전체적인 추이를 보면 성종 대에 656건의 사평이 있어서 연평균 26건이 넘고 중종 대에 1210건으로 연평균 31건, 인종 1년 재임기간에 50건의 사평이 있었고, 명종 대에도 39년 재임 기간 동안 1254건의 사평이 있어서 연평균 57건의 사평이 수록되어 있다. 이후 선조 대에 연평균 16.5건을 거쳐 광해군 대 4.6건, 인조 대에 6.2건으로 줄어들었다. 정조실록 이후에는 실록에 사평이 수록되지 않았다. 1741년(영조 17)에 한림 선발 방식이 회천제(回薦制)에서 소시제(召試制)로 바뀐 것이 크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이러한 추세를 보면, 사관들에 의한 사평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었던 시기는 사림 정치가 전성을 이루었던 시기와 일치한다. 사림 정치가 흥망과 사관들의 활동은 같은 추이를 보이는 것이다. 선조 대 이후 당쟁이 격화되면서 사평은 점차 줄어들고 선조수정실록이나 현종개수실록, 숙종실록보궐정오, 경종개수실록과 같이 정치적 입장에 따라서 실록이 다시 편찬되기도 하는 극심한 정치적 대립은 사평이 제대로 실리기 어려운 환경으로 바뀌었다고 생각된다. 그러한 정치적 대결의 귀결점이 영조에 의한 한림 회천제의 폐지와 소시제의 운영이었을 것이다. 사관의 평가가 인물평에 집중되어 있고 또 악평이 대부분이었다는 것의 사례를 선조실록에서만 몇 개 찾아본다. 송강 정철은 우리나라 가사 문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우계, 율곡과도 교유를 하고 문과를 거쳐 최고위직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임란 중에 인성 부원군(寅城府院君) 정철(鄭澈)이 사직을 하자 비변사에서는 정철이 호서, 호남을 지키는 데 중요한 인물이니 사직하는 것을 회유하라고 권하라는 기사에서 정철에 대한 인물평이다. 사신은 논한다. 정철의 성질은 강직하고 편협하여 좋아하는 경우에는 단점을 모르고 싫어 하는 경우에는 장점을 몰라서 사류(士類)로 하여금 분열되게 하고 조정이 조용하지 못하게 했다.(『선조실록』 26년 1월 10일조) 임란 중 좌의정 윤두수가 파직시켜 줄 것을 청하자 윤두수에 대해서도 젊은 사신들의 혹평이 이어졌다. 사신은 논한다. 사사로운 정이 너무 많아 청의(淸議)가 용납하지 않았다. 2년이나 재상으로 있으면서 재상 자리를 우습게 만들었다.(『선조실록』 선조 26년 10월 8일조) 경상좌도의 군사와 명나라 군사를 동원하여 왜군을 공격하는 어전 회의에서 도원수 권율이 나오자 사신은 권율에 대한 평가를 다음과 같이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권율은 사람됨이 보통이고 특별한 명성은 없었는데 마침 기회가 와서 우연히 행주에서 대첩을 이루었으니 공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원수라는 중요한 직임을 맡아서는 속수무책으로 한 가지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 아! 이처럼 불학무식한 무리에게 중요한 일을 맡겼으니, 나라에서 사람을 임용하는 것이 그 직책에 맞는다고 하겠는가? 일이 안되는 것이 당연하다.(『선조실록』 26년 7월 11일조) 국왕 선조가 평안도로 파천하여 숙천(肅川)에 행행(行幸)하였을 때의 기사이다. 사신은 논한다. 복수할 뜻은 독실하나 토벌할 힘은 미약하여 오가며 호소하느라 도로에서 방황한 지 벌써 해를 넘겼다. 아, 슬프다. 묘당(廟堂)의 여러 신하는 기이한 계책을 발상하여 주상의 치욕을 씻어버리지는 못하고서 복수하는 거사와 토벌하는 책임을 명장에게 넘겨주고는 가만히 앉아서 그 성공을 누리고자 하니, 이것이 어찌 매우 수치스러운 노릇이 아니겠는가.(『선조실록』 26년 3월 26일조) 인물평이 들어가 있는 기사는 사관들 사이에서는 공개되어 있는 시정기에는 수록될 수가 없고 사관이 집에 보관하고 있는 가장 사초에만 수록되어 있는 기사들이다. 이러한 가장 사초가 제출되어 실록청에서 각 기사를 편찬할 때에 사평도 같이 채택하여 수록하는 것이다. 『선조실록』은 선조가 죽은 후 동인, 북인이 집권한 광해군 초년에 편찬되었으므로 반대당인 서인 인물들에 대해서 좋은 평이 나올 수가 없다. 동인이나 북인인 인물들에 대한 반대당 사관의 인물평이 있을 터이지만 그러한 사초는 제출되지 않았거나 편찬 과정에서 제외되었을 것이다. 글쓴이 김현영(金炫榮) 한국고문서학회 명예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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