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의기억] 조선시대 3대 시계제작자, 석당(石塘) 나경적(羅景績, 1690~1762) 게시기간 : 2020-04-25 07:00부터 2030-12-17 21:00까지 등록일 : 2020-04-24 14:29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풍경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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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 야사(野沙) 사람 나경적! 그는 누구인가? 『이재난고(頤齋亂藁)』로 학계의 주목을 받았던 조선후기 학자 황윤석(黃胤錫, 1729~1791)이 이렇게 말했다. “대개 이 자명종은 처음 서양에서 나왔으나, … (이를) 본떠서 만들 수 있는 자는 도성에서는 최천약(崔天若)과 홍수해(洪壽海)이고, 호남에서는 동복현(同福縣) 사람 나경훈(羅景壎) 뿐이다.”1) 전국에 알려져 있는 자명종 제작자 세 사람 중 하나로 동복의 나경훈을 꼽았다. 나경훈은 나경적(羅景績, 1690~1762)의 다른 이름이다. 나경적! 아직까지는 꽤 생소한 이름이다. 근래에 들어 호남 실학의 선구자로 주목받기 시작했다.2) 나경적의 본관은 금성(錦城), 자는 중집(仲集), 호는 석당(石塘)이다. 나재우(羅載祐)의 아들로 태어났다. 무안읍 교촌리 부근에 살다가 동복현 야사리(현재 전남 화순군 이서면 야사리)로 옮겨왔다. 나재홍(羅載弘)에게 입양되었다. 호남 실학의 선구자로 명물도수(名物度數)의 학문에 관심이 많아 자명종(自鳴鐘)·자용침(自舂砧, 방아)·자전마(自轉磨, 맷돌)·자전수차(自轉水車) 등을 제작하여 실생활에 활용하도록 하였다. 그 제작 방법은 전해지지 않으나, 중국 제도의 결함을 보충하고 서양 방법을 참고하여 모방이 아닌 창조적 발상을 통해 제작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문집으로 『석당유고(石塘遺稿)』가 있으나 아쉽게 전해지지 않는다. 이처럼 실학적 지식을 실생활에 구현한 실천적 학자였지만 은거하여 묻힐 뻔했다. 그런 그가 세상에 이름을 남기고 저 멀리 중국에까지 명성을 드높이게 되는 계기는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 1731~1783)과의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그 만남에서 그는 ‘철제(鐵製) 혼천의’를 만들게 된다. 나경적이 그 이름을 남기게 된 이른바 ‘철제 혼천의’는 어떤 사연을 담고 있을까? 나주 금성관에서 ‘철제 혼천의’를 만들다. 혼천시계는 천구(天球)의 입체 모형인 혼의(渾儀)나 혼상(渾象), 또는 평면 천문의기에 시계장치를 결합하여 천체의 운행을 재현하며 시간을 알리는 장치였다. 여기에는 조선 지식인들의 창의성이 집합되어 훌륭한 혼천시계들을 탄생시켰다. 그 중에서도 나경적과 홍대용이 함께 만든 통천의는 독특한 위치를 점한다. 중국에서는 오히려 맥이 끊긴 혼천시계는 조선에서 부활하여 꽃을 피웠다.3) 혼천시계는 세종대 수운(水運) 혼천에서 이민철의 수격식(水激式) 혼천시계를 거쳐 송이영의 추동식(錘動式) 혼천시계로 진화하였다.4) 그 중에서 송이영의 혼천시계가 특히 유명하다. 통천의는 1762년(영조 38)에 완성되었다.5) 18세기 중반 이때는 서양의 문물이 많이 들어와 조선 지식인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특히 천문학과 시계기술의 영향이 컸다. 통천의는 이른바 서법(西法)을 받아들이는 방식에서 하나의 주요한 예시를 보여주었다. 먼저 나경적(이하 석당)이 담헌을 만나 통천의를 탄생시키기까지의 과정에 대하여 살펴보자.6) 석당이 이미 일흔의 나이로 동복(同福) 물렴정(勿染亭) 아래에 은거하여 있을 때, 29세의 젊은 홍대용이 나주목사로 부임한 아버지 홍력(洪櫟)를 만나러 나주에 왔었다. 이때 그는 석당과 그 제자인 안처인(安處仁)이 혼의의 제조와 운용의 이치를 잘 꿰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직접 찾아와 만났다. 그 자리에서 석당은 손수 만든 후종(候鍾)을 보여 주었다. 이를 보고 홍대용은 “서양 법에 유래하였는데, 제작이 정밀하여 하늘의 신묘한 공을 빼앗을 만하다.”고 하면서 그 재주와 고안의 교묘함을 신기하게 여겨 몇 시간 동안을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 석당은 이미 자명종을 여럿 만든 경험이 있었다. 김시찬(金時粲)의 장성 집에 있던 강철로 만든 자명종 또한 석당이 만든 것이었다.7) 다만 그는 집이 가난하여 제작비를 마련할 수 없어 그 뜻을 제대로 펴지 못하고 있었다. 홍대용도 혼천의 제도에 일찍부터 관심을 갖고 있었으나 그 요령을 얻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석당과 의기투합하여 함께 완성하기로 약속하였다. 그리하여 이듬해(1760년) 첫여름에 석당은 나주 금성관에 가서 시계 만드는 일을 시작하였다. 재력을 많이 들여 손재주 있는 장인(匠人)들을 불러들여 작업을 재촉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제품을 만들었으나 거칠고 커서 다시 철제 기구에 맞게 작게 만들기로 하였다.8) 그후 두 해가 지나서 대략 이루어 놓았다. 이때 만든 것이 ‘철제 혼천의’로 여기까지는 주로 석당이 주도하여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9) 이렇게 만들었지만, 도수(度數)에 자못 착오가 있었고 여전히 기물이 너무 거칠고 크며 혹 쓸데없이 번쇄한 것도 있었다. 이에 번잡한 것을 버리고 간이(簡易)하게 하여 힘써 천상(天象)에 맞게 하였고, 또 후종(候鍾)의 제도를 취하여 톱니바퀴가 서로 돌아 밤낮으로 하늘을 따라 운전함에 각각 그 도수를 얻게 하였다. 또 한 해가 지나서야 제작을 마칠 수 있었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통천의였다. 홍대용은 이 통천의를 천안 수촌의 집에 농수각을 지어 옮겨 보존, 활용하였다. 다만 아쉽게도 석당은 통천의의 완성을 끝까지 지켜보지 못하고 1762년 6월에 생을 마감하였다. 하지만, 이 일을 하는데 홍대용이 말하듯이 “명물(名物)과 도수(度數)에 관한 것은 대개 석당 나공(羅公)의 뜻에서 나왔고, 제작의 교묘한 기술은 안(처인)씨의 손에서 많이 이뤄졌다.”10)고 하였듯이, 석당이 없었으면 아예 일을 시작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서로의 역할이 조화를 이루면서 각자의 장기를 발휘할 수 있었다. 그래서 “대개 나경적과 안처인은 담헌을 만나지 못했으면 그 기재를 발휘할 수 없었으며, 담헌은 두 사람을 얻지 못했으면 그 거대한 제작을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11)라고 한 것처럼 이들의 인연은 통천의라는 또 하나의 명물을 탄생시킨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옛 제도에 기반하여 서법을 참작하다. 통천의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지켜봤던 김이안(金履安)이 직접 농수각에 올라가 보고 나서 말하기를 “그 제조된 것을 보니 혼천의의 구제(舊制)를 토대로, 서양(西洋)의 설을 참용(參用)한 것”12) 이라 하였다. 담헌은 “혼의의 옛 제도에 나아가 번다함을 줄여 서법과 서로 통할[會通西法] 수 있도록 의기 하나를 창립하여 통천의(統天儀)라 이름하였다.”13)라고 하였다. 이는 단지 서법을 무조건 수용한 것이 아니라, 옛 제도를 고쳐 서법과 통하게 했다는 것이었다. 서법만을 따른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의미있는 변화였다. 담헌은 또 석당의 제문(祭文)에 “선기옥형에 근본하여 의혹들을 없애고 서양의 방법을 참작하여, 그 신기함을 탐구하였다네.”14)라 하였는데, 여기서 “서양의 방법을 참작하여”[參之西法]라는 표현은 앞서 본 “회통서법”과 통하는 말이다.
교양으로 자리 잡은 서양과학 동복이라는 외진 곳에 은거해 살던 나경적이 어떻게 서법에 접해 자명종의 제조와 운용의 이치를 잘 꿰고 있을 수 있었을까? 더구나 전국 3대 시계제작자에까지 이름을 올릴 수 있었을까? 거기에는 당시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지식인 사회에서 서양 과학이 경학적 교양지식이 되었다는 점에 주목하고 싶다. 서양 과학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교양으로 꼭 갖추어야 할 지식으로 인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영조시대 말부터 천문학과 수학을 거의 전문가 수준으로 학습하고 논의하는 지식인들이 다수 있었다는 것이 바로 이런 흐름을 증명한다.15) 석당이 3대 시계제작자로 이름을 올릴 수 있었던 것, 담헌과 함께 통천의라는 또 다른 혼천시계를 남기게 된 것도 바로 이런 사회적 분위기 덕분이었다. 지방의 선비도 의지만 있으면 이렇듯 과학지식을 갖출 수 있었다. 이는 선기옥형이 왕정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유교지식인이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상식이며 관심사였고, 서양의 과학이 전래되면서 그 관심이 더욱 커졌기 때문이었다. 이는 자연학의 독자적 가치를 인정하고 그 법칙을 객관적으로 탐구하는 길로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의미 있는 변화였다. 물염정 사람들 남국(南國)의 기이한 선비로서 석당이 이런 지식을 갖추게 된 것은 결코 혼자만으로는 불가능했다. 여기에는 물염정 사람들과의 관계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석당이 살았던 동복 물염정(勿染亭)16) 아래 마을은 현 전남 화순군 이서면 야사리(野沙里)로, 호남 실학의 대표자인 규남 하백원((河百源, 1781〜1844)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이곳은 호남 실학의 본거지였다. 그런 점에서 석당의 지식 형성 및 실천의 과정에는 하백원가와의 교류가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생전에 같은 마을에 살던 하영청(河永淸, 1697〜1771)과 실학을 논하며 가깝게 지냈다. 석당은 하영청의 병암정사(屛巖精舍)에 자주 들러 시문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후종(候鍾), 기형혼천의(璣衡渾天儀), 자전수차(自轉水車) 등을 제작할 때 함께 하였다. 하영청은 하백원의 증조부로, 호는 병암(屛巖)이었다. 아들 하정철(河廷喆, 1727∼1771) 역시 석당과 하영청이 혼천의를 제작하는 것을 곁에서 지켜보았고 홍대용과도 친교를 맺었다. 이런 연유로 그의 실학은 하백원에게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적벽삼유록(赤壁三遊錄)』을 보면 1742년에 나경적, 하영청, 정민 등 62명이 유람을 같이 하고 시를 읊었다고 한다. 이때 함께 했던 사람들과 지식을 공유했을 것으로 보인다. 교유관계를 보면, 김창흡(金昌翕)·조정만(趙正萬)과 시를 주고받았고, 정민하·권진응·권제응 등과도 친분을 나누었다.
【그림4】 나경적 알리기에 큰 역할을 한 『국역 석당실기』
제자로는 안처인·염영서(廉永瑞) 등이 있었다. 안처인은 나주 금성관에서 통천의를 만들 때 제작 기술에 장점을 발휘하였고, 석당이 죽은 후에 통천의를 마무리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또 한 사람의 제자 염영서는 나주에서 성장했고 동복으로 이거하여 석당의 영향을 받았다. 석당이 나주에서 선기옥형을 만들 때도 동참하여 그의 과학기술을 발휘했다. 1772년에 또 박찬선(朴燦璿)· 박찬형(朴燦瑛) 종형제가 맞이하여 흥양(지금의 고흥) 호산(虎山)으로 가서 몇 년을 머무르며 윤종 두 개를 제작했다.17) 『금성나씨대동보』에는 석당의 큰아들 나심좌(羅審佐, 1710∼1779)가 필사본으로 『인재집(忍齋集)』을 남겼다고 하고, 증손자 나상근(羅祥根, 1777∼1850)은 자명종과 자전수차를 속수(續修)하여 인정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처럼 석당의 실학은 이용후생의 가학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복원하여 그 과학정신을 이어가자. 석당 나경적에 대하여는 홍대용을 통해 부분적으로 소개되다가 근래에 관심들이 높아졌다. 호남의 실학자로 네 명의 대가를 꼽는다. 전북 순창의 신경준(申景濬), 전남 장흥의 위백규(魏伯珪), 전북 고창의 황윤석, 그리고 전남 화순의 하백원이 거기에 속한다. 근래 여기에 덧붙여야 할 인물로 석당 나경적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2017년 규남박물관에서 자료집으로 『화순 야사사람 석당 나경적 –글과 자료모음』을 펴냈고, 이어 2017년 10월 안동교 선생의 노력으로 『국역 석당실기』가 발간되었다. 이를 기념하여 “실학의 선구자, 석당 나경적 선생 학술대회”도 열었다. 이로써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2018 11월 10일에는 나간채 교수의 수고로 ‘화순실학기념사업회’가 출범하여 석당 나경적과 규남 하백원을 중심으로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연구를 추진해 가기로 했다. 이후 여러 지상을 통해 자주 접하게 되었다. 송이영의 혼천시계는 동아시아의 혼천의 제작 전통과 서양의 자명종 기계 장치가 융합된 창조물이었다. 이는 석당의 ‘철제 혼천의’ 그리고 이어지는 ‘통천의’를 통해 계속 발전하였다. 그 중 송이영의 혼천시계는 우리나라 과학문화재 중에서 세계 과학사학계에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영국의 저명한 과학사학자인 니덤(J. Needham) 박사가 이를 “완벽하게 복원하여 세계 과학박물관에 전시하자.”라고 하여 더욱 유명해졌다.18) 이렇듯 혼천시계는 동양의 전통과 서양의 기술이 조화를 이룬 새로운 창작품이었다. 석당이 나주 금성관에서 만든 것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천문과학사의 소중한 유산인 이 혼천시계는 복원하여 전시할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규남박물관이든 나주 금성관이든 연고 있는 곳에 복원하여 과학 전남의 역할도 알리고 그 전통의 맥도 이어지기를 바란다.
1) 『頤齋遺稿』 권1, 「自鳴鐘」. 당시 시계 제작은 관상감, 동래를 중심으로 활발했다. 이를 각각 최천약(崔天若, 1724~1776)과 홍수해가 대표한다. 최천약은 숙종 대 이미 각종 천문 기계를 제작하였으며, 이후 영조의 명령을 받들어 독자적으로 자명종을 제작하는 등 과학기술 분야에서 두드러진 활동을 펼친 인물이다. 홍수해는 기장(機張) 출신으로 왜관에서 과학 기술을 익히고 활동하였다. 한편, 호남도 이들 지역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그 중심 인물이 바로 나경적이었다. 순수 민간에서 활동했다는 점에서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2) 나경적의 생애와 선기옥형의 제작과정 등에 대하여는 안동교, 「석당 나경적의 생애와 실학활동」(『석당 나경적선생 학술대회 자료집』, (사)한국학호남진흥원, 2017)에 상세하다. 3) 韓永浩, 南文鉉, 李秀雄, 「朝鮮의 天文時計 연구-水激式 渾天時計」(『한국사연구』113, 한국사연구회, 2001. 6.), 58쪽. 4) 민병희, 함선영, 최고은, 「나경적 자명종의 개념과 그 구조」(『석당 나경적선생 학술대회 자료집』, (사)한국학호남진흥원, 2017) 5) 통천의에 대하여는 한영호, 「籠水閣 天文時計」(『역사학보』177, 2003) 참조. 6) 이 부분은 『湛軒書』 外集 卷6, 「籠水閣儀器志」, 「統天儀」; 『湛軒書』 外集 3卷, 「杭傳尺牘」 「乾淨衕筆談 續」 중 24일자 ‘籠水閣渾天儀記事’ 등을 중심으로 정리하였다. 7) 『頤齋亂藁』 卷3 8) 「홍대용이 하정철에게 답하는 편지」(경진 1762년 6월 3일), 규남박물관 소장. 9) 한영호, 「籠水閣 天文時計」(『역사학보』177, 2003), 26쪽. 10) 『湛軒書』 外集 卷3, 「杭傳尺牘」 「乾凈衕筆談 續」 중 24일자 ‘籠水閣渾天儀記事’ 11) 『湛軒書』 外集 卷3, 「杭傳尺牘」 「乾凈衕筆談 續」 중 27일자 서찰 12) 『湛軒書』 外集 附錄 「愛吾廬題詠」 「籠水閣記」(金履安) 13) 『湛軒書』 外集 卷6 「籠水閣儀器志」 「統天儀」 14) 『湛軒書』 內集 卷4, 「祭羅石塘文」 15) 전용훈, 「정조시대 다시보기-천문학사의 관점에서」(『역사비평』 2016. 5., 역사비평사), 199∼200쪽. 16) 물염정은 송정순(宋庭筍, 1521∼1584)이 세웠고 외손인 나무송(羅茂松, 1577∼1653)이 물려받았다. 17) 『頤齋亂藁』 卷4 「輪鐘記」 18) 니덤(J. Needham), 『중국의 과학과 문명』(1965) 제4권 「기계공학편」; 문중양, 『우리역사 과학기행』(동아시아, 2006) 글쓴이 고석규 목포대학교 前 총장, 사학과 명예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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