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시초대석] 작법으로 읽는 한시 절구(6) 네가 부럽다[羨爾] 게시기간 : 2020-05-07 07:00부터 2030-12-17 21:00까지 등록일 : 2020-05-06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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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시초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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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유계(1607~1664)가 지은 것이다. 유계의 자는 무중(武仲), 호는 시남(市南)이며 본관은 기계(杞溪)이다.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으로,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윤선거(尹宣擧), 이유태(李惟泰) 등과 함께 충청도를 대표하는 산림오현(山林五賢)으로 추앙을 받았다. 1633년(인조11)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헌, 이조 참판 등을 지냈다. 사학과 예학에 밝아 『여사제강(麗史提綱)』, 『가례원류(家禮源流)』라는 저술을 남겼고, 문집에 『시남집(市南集)』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유계는 44세 되던 해인 효종 1년(1650) 4월에 함경도 온성(穩城)으로 유배되었다. 인조가 승하한 뒤 그 시호를 정하는 문제로 소를 올렸는데, 상소 중에 인조를 비방하는 내용이 있다고 하여 효종의 노여움을 샀던 것이다. 위의 시는 이 당시 유배 도중에 지은 것이다. 제목의 진목역(鎭木驛)은 진목역(眞木驛)의 오자로, 강원도에 있던 역참이다. 역참은 전통 시대 때 교통과 통신을 위해 지방 주요 고을에 설치했던 기관으로, 공문서의 전달, 국방 정보 보고, 관원의 공무 출장 및 외국 사신의 내왕 때 그 숙식을 제공하는 등의 역할을 담하였는데, 역마를 상시 비치하고 있었다. 역졸은 그곳에 소속되어 역마를 관리하거나 심부름 등 잡역을 담당하던 사람을 말한다. 첫 두 구절은 자신의 경험을 말한 것이다. 당시 유계는 말과 글로 인한 화를 실감하고 있던 터였다. 병자호란 당시 시강원 설서로 있으면서 척화를 주장하다가 화의가 성립하자 임천으로 유배된 적이 있었는데, 이번에 또 인조의 묘호를 ‘조(祖)’가 아닌 ‘종(宗)’으로 할 것을 주장하다가 선왕을 욕되게 하였다고 하여 유배길에 올랐다. 그 주장의 정당성 여부는 차치하고 관원으로서는 중형인 유배를 두 번이나 당했으니 말과 글로 인한 대가에 대한 그의 인식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세 번째 구절부터는 진목역의 역졸인 지응룡에 대한 부러움을 노래하고 있다. 이 시의 주석에 의하면 진목역의 역졸인 지응룡은 사서이경(四書二經)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사서이경을 독파하였다면 당시에도 남에게 무시를 당하지 않을 정도의 높은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유계로서는 일단 그런 정도의 학식을 지닌 사람이 그런 잡역에 종사한다는 것이 놀라웠을 것이다. 그리고는 이내 귀양 가고 있는 자신의 신세와 비교하면서, 배움이 있어도 차라리 등용되지 않는 것이 더 지혜로운 처신일 수 있다는 탄식을 하였을 듯하다. 제3구의 선이(羨爾)는 ‘네가 부럽다.’는 의미의 시어이다. 절구의 제3구 첫머리에 자리하고, 뒤에는 그 부러워하는 이유를 제시하는 것이 일반적인 용법이다. 사람은 늘 자신이 갖지 못한 것에 대해 부러워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옛날부터 한시를 짓는 시인들은 이 시어를 꽤 자주 사용했었다. 조선의 신정(申晸)이라는 시인의 문집에는 여섯 번이나 동일한 용법이 보인다. 이 시어가 사용되는 시는 주로 지방관으로 부임하는 사람, 유람을 떠나는 여행객, 승려에게 주는 것들이다. 특히 승려의 경우는 속세의 힘든 경쟁에서 벗어나 한가하게 지내는 것을 부러워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승려라고 해서 마냥 한가로울 수 있을까?
송나라의 시인인 성재(誠齋) 양만리(楊萬里)의 시가 정곡을 찌른다. 한가해 보이는 승려가 한없이 부러웠지만 막상 승려가 되고 보면 속세에서 바라보는 것처럼 그렇게 한가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제3구 원문 중의 ‘능(能)’자가 묘미가 있다. ‘능’자는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지응룡이 낮은 신분으로 있는 것은 타의에 의해 피동적으로 주어진 환경 탓이 아니라 자의적으로 선택한 것임을 강조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앞의 ‘선이’의 용법이 상투적이지 않게 해 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글로 인한 재앙은 필화(筆禍), 말로 인한 재앙은 설화(舌禍)다. 중국 송(宋)나라의 유명한 문호인 동파(東坡) 소식(蘇軾)이 황주(黃州)로 유배된 일,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이 「조의제문(弔義帝文)」으로 인해 무오사화(戊午史禍) 때 부관참시(剖棺斬屍) 당한 일, 외척의 발호를 비꼬는 「궁류(宮柳)」 시를 지었다가 곤장을 맞고 죽음을 당한 석주(石洲) 권필(權韠) 등의 사례가 모두 필화로 인해 생긴 일이다. 그러나 이 때 필화를 입은 이들은 그 대의명분이 분명하였기 때문에 곤경은 일시적인 것이었고 후대에는 오히려 존경을 받았다. 현대에는 미디어, SNS 등 각종 매체의 발전 때문인지 필화와 설화를 더욱 자주 접하게 된다. 개인의 의사 표현에서부터 신문, 방송의 기사, 정치인의 막말까지 쉽게 만들어지고, 쉽게 퍼져나가는 환경이 조성된 만큼 그에 따른 반향도 클 수밖에 없다. 말과 글은 남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지만, 그로 인해 상처를 받기도 한다. 쉽게 말하고 쉽게 쓰는 것, 두려워해야 하지 않을까? 글쓴이 권경열 한국고전번역원 책임연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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