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 길을 열다] 백비(白碑), 시호를 청하지 말고 비석을 세우지 말라! 게시기간 : 2020-05-08 07:00부터 2030-12-17 21:21까지 등록일 : 2020-05-07 18:04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선비, 길을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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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6년 여름 옥과현감을 끝으로 김인후는 벼슬 생각을 끊었지만, 조정에서는 여러 차례 불러들였다. 이듬해 이른 봄 「정목(政目)을 보고」를 적는다.1)
어떻게 하면 초심을 지킬 수 있을까 다독였을 뿐 나섬과 물러남의 출처 의리를 직설하지 않았는데 꽃샘추위에 자신의 망설임과 부모, 좌수(座首)의 욕망을 녹여내는 작풍이 은근하고 아릿할 뿐이다. 1549년 여름과 가을 순창 훈몽재에서 지낼 때에도 좋은 날이 왔으면 하였을 뿐이었다.2) “…누대에 걸친 임금의 은혜 태산처럼 무거우나, 이 몸에 얽힌 모진 병의 세월은 더디구나. 해바라기 촌심은 끝내 사라지지 않으리니, 만년까지 티끌 정성이나마 간직해야지.” 이해 초겨울 김인후는 부친상을 당하고 이태 후 모친을 여의었다. 1553년 7월 상복을 벗자 연거푸 성균관 직강, 홍문관 교리가 내려왔다.3)
그런데 이때 빗장치고 앉아있다면 왕명을 소홀히 하고 조정을 업신여긴다는 풍파가 일 듯 싶어 늦가을 구월 길을 나섰다. 『연려실기술』에 일화가 전한다.4) “명종이 홍문관 교리로 소명하자 두어 섬 술을 싣고 나서 길가 주막에서 잔을 기울였는데, 십여 일 동안에 겨우 두어 날 길밖에 가지 않았다. 그러다가 술이 떨어지자 병을 칭탁하고 내려왔다.” 당시 김인후의 동반이 있었다. 갈재를 넘고 너른 들판을 지나며 만난 김제군수 김명언(金明彦)으로 척신 윤원형에게 조아리지 않은 이유로 파직당하고 개성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5) 오언장편 「김명언과 헤어지며」는 이때의 작품이다.6) 때마침 산협에 비가 쏟아지자, 개천 마을 저녁은 암담하였고, 동쪽 언덕 너머 찬바람 으스스한데, 중양절이라 술마저 떨어졌다더라. 갈원에선 차가운 달 마주하며, 여러 길손과 잔을 나눴고, 저물녘 포구에서는 멀리 돌아 배를 타고, 하얀 백사장에서 말을 달렸지. 두 사람은 금강을 지나 차령을 넘었는데, 빗물, 찬바람 핑계하며 한참 머물다가 멀리 돌아 포구를 찾고 백사장을 말 타고 맴돌다가 서너 날이면 족할 길을 보름이나 갔던 것이다. 그리고 천안을 지나 진위 갈원에서 새벽까지 깊은 잔을 나누고 헤어졌다. “새벽 달빛 하도 맑고 좋아라, 행장 챙겨 일찌감치 떠나야겠네. 친구와 어울리며, 이 밤만은 한자리에 누워 보세나.” 지난 보름 아스라함을 다잡고 사직전(辭職箋)을 올렸다.7) ‘성군(중종과 인종)이 잇달아 승하한 후 부모를 잃고 병이 깊어 경전을 외우고 물었던 기억조차 까마득하고 간망증도 심함’을 호소하며 이렇게 마감하였다. “주상전하께서는 병이 들어 감당하기 어려운 몸을 불쌍히 여기시어 고향에서 목숨을 마치도록 허락하옵소서. 또한 훌륭한 선비를 찾아 제수하시면 조정의 관작도 문란하지 않고 소신 또한 시골집에서 편안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임금도 “뜻은 매우 간절하나 누가 숙환이 없겠는가. 임금 섬기는 대의 또한 등한할 수 없으니 신병을 조리하고 올라오라고 글을 내려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즈음 전라도 관찰사와 고을 수령이 임금의 명령에 따라 얼마간의 물품을 보내왔을 때, 먹물에 적신 반가움은 차라리 쓰라림이었다. 감사에게 종이를 받고서는, “아내는 머리빗 첩을 만들자 하고, 아이들은 혼서지(婚書紙)로 썼으면 하는데, 제반 요청을 사무치게 쓸어버리고, 미친 듯 시를 베끼다 취하고 말았네.” 하고,8) 수령이 보리를 보내오자, “조각조각 누런 구름에 보리가 영글지 않아, 고된 백성 밭두둑에서 발버둥 쳐댈 뿐. 뜻밖에 놀랍게도 열 가마 곡식을 받고, 일꾼 먹일 들밥 짓기에 앞서 술 빚을 생각이 먼저 들다니.” 하였던 것이다.9) 그러고선 ‘제목도 없이’ 붓끝을 적셨다.10)
이렇듯 김인후가 백수(白首)ㆍ취옹(醉翁)을 자처하던 시절, 지중추부사 박수량(朴守良)이 한양에서 일기를 마감하였다. 1554년 정월, 향년 64세, 선대는 태인에 살다가 증조가 담양 추월산 거쳐 장성 황룡 아곡리에 터를 잡았다. 일찍부터 장성 삼계 출신 송흠(宋欽, 1459∼1547)과 명망을 나란히 하였던 청백 재상으로, 함경도ㆍ전라도ㆍ경기도 관찰사와 한성부판윤ㆍ호조판서ㆍ우참찬 등을 지냈다. 젊은 시절 박수량은 활달하였다. ‘탄식하노라, 내 배움의 몽매함을. 보고 듣는 것이 어찌 일상 대수롭지 못함에 얽매어 있는가!’로 시작하는 「망해부(望海賦)」는 바다와 같은 드넓은 포용과 드높은 기상으로 살며 배우겠다는 각오를 드러낸 명품이다.11) 한쪽만 본다. 가느다란 물길을 가리지 않으니 내 기상의 관용을 키워주고, 가득 차서 넘치니 내 마음의 덕성을 북돋아 주도다. 모든 계곡을 끌어들이니 뭇 이치가 하나로 돌아가고, 한 번 들었다 한 번 빠져가니 삼라만상의 변천을 알려주도다. 당시 감사는 ‘해남에서 윤구(尹衢)의 문장을 얻고 고부에서 박수량의 부(賦)를 얻었다’며 한양 지인에게 널리 알렸다고 한다. 윤구(1495∼1549)는 머지않아 기묘사화로 파직되어 향리에서 후진을 양성하였는데, 그 증손에 훗날 효종의 잠저 시 스승이며 서인권력을 매섭게 비판한 직신(直臣)이자 「어부사시가」 「오우가」 등 빼어난 시조를 남긴 윤선도(尹善道)가 있다. 박수량은 벼슬 시작하고 얼마 후 기묘사화를 겪고부터는 전혀 달랐다. 두주불사, 술에 정량이 없었지만, 사교를 꺼리고 문장도 주고받지 않았으며 그 흔한 자호(自號)조차 없었다. 자는 군수(君遂). 1523년 가을 병조정랑을 휴직하자 평소 절친한 강릉 출신 동료 심언광(沈彦光, 1487∼1540)이 한강까지 배웅하며 “떠나고 머무는 정나미가 어떠하든, 맑은 술잔 앞에서는 속내를 펼쳐야지. 구월 가을 강 숲이 어둑하니, 나그네 천 리 길을 재촉하구먼. 붉은 구름 북극(北極)에 아득하고, 흰 기러기 남천(南天)을 날아오네. 훗날 호남의 술을 가져오면, 행여 오늘 석별의 잔을 기억하려는지?”하였어도, 대꾸가 없었다.12) 우리나라 처음 백운동서원을 창설한 학식 높고 문장 좋은 주세붕(周世鵬)과 교유가 깊었지만, 서로 시문을 나눴다는 흔적이 없다. 박수량은 별다른 정책을 제기하지 않았고 정치적 쟁점과는 거리를 두었다. 태안반도 물길 가파른 의항(蟻項) 굴착공사를 차분하게 마감하는 등 주어진 임무를 근실하고 엄격하게 수행할 따름이었다. 기묘사화를 일으킨 심정(沈貞)의 수하로 악명 높은 이항(李沆)ㆍ김극핍(金克愊)을 탄핵하고, 을사사화로 막강 권세를 구축한 이기(李芑)가 각처에 숨겨놓고 부리던 사반(私伴)을 적발하였지만, 정치적 입장에서가 아니라 사헌부, 전라감사의 직책을 수행하였을 뿐이다. 아마 모친상 마치고 조정의 부름을 받았던 1546년 봄에 지었을 듯싶은 「한양에 들어가며 읊음」은 나름 관료로서의 원칙 자세로 읽어도 무방할 듯싶다.13)
밋밋하다. 이러한 박수량에 대한 실록의 사평이 다음과 같았다.14) “전라도의 소탈하고 담박한 재상으로는 송흠이 제일이고 그 다음으로는 박수량이다.” “박수량은 소싯적부터 권문을 추종하지 않고 청백으로 자신을 지켰으므로 육경의 지위에 이르도록 남의 집을 빌어서 살았다.” 다음은 세상 떠났을 때의 졸기(卒記)다.15) “박수량은 호남사람이다. 초야에서 나와 좋은 벼슬을 두루 거쳤으며 어버이를 위하여 여러 번 지방에 보직을 청하였다. 일처리가 정밀하고 자세했으며 청백함이 더욱 세상에 드러났다. 아들이 일찍이 서울에 집을 지으려 하자 ‘나는 본래 시골 태생으로 우연히 성은을 입어 이렇게까지 되었지만 너희들이 어찌 서울에 집을 지을 수 있겠는가!’ 하였으며, 그 셋집도 10여 간을 넘지 않도록 경계하였다. 그가 죽었을 때 저축이 조금도 없어서 처첩들이 상여를 따라 고향으로 내려갈 수 없었으므로 대신이 임금께 계청하여 겨우 장사를 치렀다.” 1554년 2월 박수량의 상여가 내려올 즈음, 의금부 도사로 있던 박수량의 큰 아들이 음택에 묻을 묘지(墓誌)를 부탁하였다. 김인후는 이웃 마을에 사는 처지에서 사양하지 못하였다. 더구나 둘째 할머니 일가로 박수량은 족숙 항렬이었고 큰 아들과도 교유가 있었다. 박수량은 일찍이 김인후에게 ‘조정 밖에 있으면 부모 봉양이 어렵지 않겠나?’ 하며, 은근히 출사를 권한 적도 있었다. 김인후는 박수량의 학업과 사환의 이력을 적고, 평소 두 아들에게 당부한 “내가 초야의 몸으로 판서의 반열에 오르는 분수 넘친 광영을 입었으니, 내가 죽거들랑 시호를 요청하거나 비석을 세우지 말라”는 상언(常言)을 그대로 옮기고 다음과 같이 명(銘)하였다.16) 금처럼 정밀하고 옥처럼 단단하게, 안에 쌓고 밖을 억눌렀도다. 검소하고 겸손하여 해되는 사람과 사귀지 않았다네. 선조에게 큰 영광을 안겨 드리고 죽은 뒤에 은전을 받았네. 자손들은 힘써 경사를 이어가며 오래도록 끊임이 없어야 하리.” 시호를 청하지 말고 비석을 세우지 말라! 부친의 평소 당부가 분명한 묘지명을 받아든 박수량의 아들은 어떠한 기분이었을까? 그래도 묘소를 알리는 푯돌조차 없을 수 없었다. 그러나 차마 부친의 관함 본관 심지어 성명을 적을 수 없었다. 이렇게 묘소 앞에 백비가 세워졌다. 한편 박수량의 상언을 묘지명에 적었던 김인후의 심사는 평온하였을까? 여섯 해 후 김인후도 유언하였다. “을사년 이후 벼슬은 적지 말라.” 이들은 왜 일신의 벼슬, 가문의 광영을 애써 기리지 않았을까? 학술과 문장이 권세와 재물에 굽실거리고 더구나 착한 선비가 죽고 쫓겨나는 오욕의 세월에 청백리가 무슨 대수이며, 벼슬과 학문이 무슨 자랑이겠으며 하물며 비석에 우람한 칭호를 새긴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자손들은 나의 육신의 영화를 기억하지 말고 마음을 새기며 행실을 이어갔으면 한다, 하였음이 틀림없다. 그런데 외척권신의 전횡이 끝나고 사림의 시대가 열리던 1570년 12월 세상 떠난 안동의 이황 또한 작은 빗돌 앞면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고 쓰고 뒷면에 세계와 행실을 간략히 서술하라고 당부하였으며, 보은 속리산 자락에서 ‘취향허보(醉鄕虛父)’를 자처한 평생 처사 성운(成運)은 1579년 5월 83세의 삶을 마감하며 ‘푯돌도 세우지 말라’고 유언하였다. ‘퇴도만은’은 안동의 도산으로 물러났으나 정녕 만년에야 은거하였다는 뜻이고, ‘취향허보’는 ‘별천지의 귀머거리 허수아비’와 같다. 우리의 문화자존 공동체의식의 저변에 이러한 마음과 마음들이 이어지고 있지 않을지? 1) 『하서전집』 권8, 「見政目」 정목은 인사발령 문서이다.
2) 『하서전집』 권10, 「己酉秋作」 “人生有命復奚疑 屑屑何須楚客悲 萬木染霜紅爛漫 千峯洗雨碧參差 君恩累世丘山重 病毒纏身歲月遲 葵藿寸心終不老 涓埃庶保晩年期” 3) 『명종실록』 권15, 8년 7월 21일 및 8월 8일; 『하서전집』 권7, 「除官日書」 4) 『연려실기술』 권9, 「仁宗朝名臣」 ‘김인후’ 5) 『명종실록』 권14, 8년 5월 14일; 김택영 『崧陽耆舊傳』 권2, 「循良傳」 ‘金明彦’ 6) 『하서전집』 권2, 「別金士美明彦」 7) 『하서전집』 권12, 「辭弘文館校理箋」; 『명종실록』 권15, 8년 9월 19일. 8) 『하서전집』 권5 「題兪監司絳之絳空狀紙」 “妻求爲櫛帖 兒冀作昏書 痛掃諸般請 狂詩寫醉餘” 강지(絳之)는 유강의 자(字)로 김인후와 동갑이며 같은 해 사마시와 문과에 들었다. 9) 『하서전집』 권7, 「城主致牟」 “片片黃雲未有秋 疲氓眞拙服田疇 准前十釜驚非望 玉露思先野饁謀” 10) 『하서전집』 권5, 「偶題」 “齊民歌舜禹 疾苦自當痊 象外逍遙客 無心已有年” 11) 『莪谷實記』 「望海賦」 “不擇細流兮 養吾氣之寬容 瀰滿盈溢兮 助吾心之德業 控引百谷 衆理之歸一 一潮一汐 識事物之消息.” 『아곡실기』에 의하면 12살에 열읍을 순시하던 관찰사에게 제출하였다고 하는데, 『해남윤씨문헌』에 따르면 당시 감사가 남곤(南袞)이라고 하였으니 1512년이므로 그때 박수량은 22살이었다. 아마 향시였을 것이다. 12) 『漁村集』 권4, 「在漢江 別朴君遂」 “去住情何似 淸樽稱意開 九秋江樹暮 千里客程催 北極彤雲遠 南天白雁來 他年湖海酒 儻記別時杯.” 세주, “君遂 爲兵曹正郞 休官 還長城” 13) 『아곡실기』 「入洛有咏」 14) 『중종실록』 권102, 39년 3월 22일; 『명종실록』 권13, 7년 2월 29일 및 9월 4일. 15) 『명종실록』 권16, 9년 1월 19일. 16) 『하서전집』 권12, 「資憲大夫議政府右參贊朴公墓誌銘」 “金精玉栗 畜內制外 約奉卑牧 不交于害 榮窮祖先 數異身後 勖哉承慶 勿替永久” 글쓴이 이종범 (재)한국학호남진흥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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