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서와 옛편지] 임금이 사랑한 소나무, 어애송(御愛松) 게시기간 : 2020-05-14 07:00부터 2030-12-17 21:21까지 등록일 : 2020-05-13 10:16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고문서와 옛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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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애송> 남산 아래 성명방(誠明坊)에 살던 검서관(檢書官) 박제가(朴齊家)는 장경교(長慶橋)로 이사하였다. 명당 서울의 좌측 날개에 해당하는 낙산 밑 풍치가 좋은 곳이다. 사도세자의 사당인 경모궁(景慕宮) 남서쪽 100보쯤 되는 곳이다. 집 앞 남쪽 창가에는 강릉부사를 지내고 서화에 뛰어난 조희일(趙希逸, 1575~1638)이 심었다는 소나무가 서 있었다. 아름드리 무게를 견디지 못하여 서른두 개의 기둥으로 받쳐놓았다. 장경교 앞으로 이사한 박제가는 낙산 너머에서 떠오르는 아침햇살을 받으며 빛나는 소나무가 아름다웠다. 아침저녁으로 푸른 싱그러움을 제공하고 깊은 그늘로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었던 그 소나무는 바로 남이 장군이 살았다는 진령원(眞泠園) 터였다. 정조가 경모궁을 참배하고 안국방에 있는 문희묘(文禧廟)를 살피려고 이곳을 지나다가 사방으로 가지를 뻗은 짙푸른 소나무를 보고 높이 칭양하고 배종한 초계문신들에게 연구(聯句)를 짓도록 명하였다. 의궤청에 근무하다가 늦게 집에 돌아온 박제가는 초계문신들이 남긴 연구에 자신도 차운하였다. [그림1] 박제가 시고 : 어애송 시
지금 임금은 말을 하면 문장이 되었다. 전에 시인 신광하를 심주(강화부) 경력으로 임명하였는데, 나에게 責旨 4언을 불러주며 쓰도록 하였는데 자연스럽게 운에 맞았다. 이어서 금중에서 직숙하는 여러 신하들에게 갱진하도록 명하였다. 며칠 후에 초계문신 6인이 반열에 배종하였다가 나의 소나무 아래에 들러서 6운을 연시로 완성하고 돌아갔다. 내가 의궤청에서 저녁에 돌아와 그 시에 차운하고 아울러 기록한다.[今上發言成章 向補詩人申光河沁州經歷也 呼寫責旨四言 天然合韻 仍命禁直諸臣賡進 數日後抄啓文臣六人 因陪班歷余松下 聯成六韻而歸 余自儀軌廳暮還 遂次之幷記] 을묘년(1795, 정조19) 4월 21일 신 제가 삼가 씀 정조는 말하는 것이 바로 문장이 될 정도로 말을 훌륭하게 잘하였다. 강화부 경력인 신광하를 책망하는 말씀을 받아적게 하였는데 말이 그대로 자연스럽게 운에 맞고 문장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 책지에 궁중에 직숙 중인 여러 신하들이 갱진을 하였다. 며칠 후에 정조가 경모궁을 참배할 때 초계문신 6인이 모시고 왔었는데 이 소나무 아래에 들러서 연시(聯詩)로 6운을 짓고 돌아가서, 자신도 의궤청에서 저녁에 돌아와 차운한 것이다. 박제가가 출근하고 있던 곳은 정리소(整理所) 의궤청(儀軌廳)이었다. 유득공과 함께 『정리통고(整理通考)』 4책을 편찬하였다. 『정리통고』는 정조가 화성 원행을 마치고 의궤 이외에도 경모궁과 현륭원(顯隆園)에 관한 여러 사실들을 담은 책을 만들어 『정리통고』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시기 박제가는 정조로부터 가장 큰 아낌을 받고 있었다. 2년 전 1793년에는 부여현감을 하다가 진휼곡 문제로 암행어사 이조원(李肇源)의 탄핵으로 유배의 위기에 처했을 때 근시(近侍) 직무를 맡았던 신하를 유배 보낼 수 없다고 감형을 하도록 조처한 것도 정조였다. 1794년 다시 검서관으로 복직한 박제가는 3~4월 동안 의궤청에 근무하면서 『정리통고』를 편찬하였다. ‘뒤죽박죽’인 자신의 정통성과 국가 재정을 한꺼번에 정리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정리소였다. 의궤청에서 근무한 성과와 업적으로 박제가는 문과 출신이나 할 수 있는 승지직을 ‘가승지(假承旨)’의 이름으로 정조를 최측근에서 보좌하였다. 왕의 총애가 깊을수록 주변 신하들의 견제와 시기, 질투도 커졌다. 어애송 시에서 박제가는 이십 년 동안 순수한 마음으로 벼슬살이를 하였고 편안히 은거할 계획을 가지고 있으나 다만 걱정은 부엌에 연기가 끊어지는 생계가 걱정이라는 것을 토로한다. 가까운 이웃과는 왕래가 끊어졌는데 멀리 청나라의 종백(宗伯, 예부 상서) 기윤(紀昀)이 편지를 보내고 있다. 이미 세 차례의 연행에서 높은 웅지를 품고 만 리 길도 가볍게 다녀왔던 자신을 돌아보고 있다. 심환지(沈煥之)는 정조에게 박제가가 화성 원행에서 돌아올 때에 반열에서 문반 참의(參議) 이상만 앉을 수 있는 휴대용 의자인 초상(軺床)에 앉았고, 또 자신의 하예(下隸)를 시켜 초상의 출처를 물으니 자신의 집에서 가져온 것에 앉았을 뿐인데 왜 간섭하느냐고 오만하게 대꾸하였다고 파직할 것을 요구하였다. 정조는 물론 박제가의 원래 성격이 그러하고 또 규정이라는 것이 사람에 따라 달리 해석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여 박제가를 두둔하였다. <장경교> [그림2] 장경교 부근 지도 장경교는 경모궁 앞에 있었다. 지금 서울대 어린이병원 앞이다. 정조가 즉위하면서 ‘장경(長慶)’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장경교는 북쪽으로는 성균관에 가깝고 혜화문을 통해서 들어오는 사람들과 물자들이 모두 이 다리를 통해서 지나갔다. 또 좌우 난간 돌을 새끼줄처럼 연결하였고 다리 아래의 시내는 샘물처럼 맑았다. 주변 둑을 끼고는 가게를 만들었고 간격을 두어 나무를 심었다. 박제가는 장경교가 성안 여러 돌다리 중에서 제일 아름답다고 하였다. 북경 교외에 있는 노구교(蘆溝橋)처럼 천록(天祿) 벽사(辟邪)와 같은 상징 짐승들을 새기지 않은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박제가는 당시 청나라의 명사들과 두루 교유하였다. 예부 상서인 기윤도 일개 검서관인 박제가에게 편지를 보내고, 대학자 이병수(伊秉綬)도 김이도(金履度), 윤인태(尹仁泰)와 함께 박제가를 생각하였다. 19세기 초 추사 김정희, 자하 신위 등의 북학 열은 ‘당괴(唐魁)’ 박제가에게서 시작된 것이었다. [그림3] 伊秉綬 詩稿
송원 김이도의 시에 차운하여 원조헌 윤인태가 조선에 돌아가는 것을 보내고 아울러 박 검서에게도 보낸다[次金松園韻 奉送/遠照軒尹君歸朝鮮 竝寄朴檢書] 건륭 임자년(1792, 정조16) 초봄 이병수 묵경 초[乾隆壬子初春 伊秉綏墨卿 艸] 송원은 김이도의 호이고, 차수는 박제가의 자(字), 원조헌은 윤인태의 호이다. 모두 북경 연행을 통하여 중국 명사들에게 이름이 알려진 사람들이다. 박제가가 그들에게 얼마나 자랑을 했는지 박제가는 장경교 서쪽에 사는 사람으로 이해가 되었다. <여협(女俠) 만덕(萬德)> 1795, 96년 갑인, 을묘년 연속으로 제주에 흉년이 들었을 때 관기인 만덕이 재산을 털어 굶주리는 백성을 구휼하였다. 정조는 이를 기특하게 생각하여 상을 주려고 하자 만덕은 사양하면서 대신 바다를 건너 서울에 가서 대궐을 구경하고 금강산을 유람하고 싶다고 하였다. 여자는 배를 타고 뭍으로 가지 못하는 것이 제주의 관습이어서 정조는 그에게 의관 벼슬을 주고 서울로 초청하여 금강산 구경을 시키게 하였다. 만덕의 육지 행차에는 정조를 비롯하여 많은 신료들이 그에 대해서 관심을 보이고 호의를 베풀고 전별시를 지어주었다. 만덕이 서울에 왔을 때 박제가는 초상 사건으로 심환지의 탄핵을 받아 울적한 시절이었다. 두문불출하고 집 앞의 푸르름을 드리우고 있는 소나무와 벗할 뿐이다. 이때 만덕에게 줄 전별시를 써주면서 지인에게 보낸 편지이다. [그림4] 박제가 간찰 喜雨孤坐 忽拜/問札 如對榻也 意謂女俠雖/行 當過今十六日歸矣 明晨何哉 詩本不足書 書是令公薦引 聊復爲之 恨不得大幅 作擘窠書 一爲行人贈 一備海神索耳 好笑 印朱借在人 未能榻家用章 可恨 近日有塞翁之福 無以出門 一如靑松爲交 惜不令重瞳姬人 一玩蒼翠耳 姑不備 丁巳(1797, 정조21, 48세)六月五日 齊家白 기쁘게 내리는 비속에 홀로 앉아 있는데 갑자기 문안 편지를 받으니 마치 마주앉은 듯합니다. 아마도 여협이 비록 간다고 해도 이번 16일이 지나서야 돌아갈 것입니다. 내일 아침은 어떻습니까? 시는 본래 글씨보다는 못하지만, 글씨는 영공께서 끌어 추천하셨으니 그냥 다시 한번 해보았습니다. 큰 글씨를 쓸 수 없었던 것이 한입니다. 조그만 글씨로 써서 하나는 행인에게 드리고 하나는 해신이 구하는 데 대비하도록 하였으니 웃어주십시오. 인주가 다른 사람에게 가 있어서 탑가의 인장을 쓸 수가 없으니 한탄스럽습니다. 근일에는 새옹의 복이 있어서 문밖을 나가지 않고 한결같이 푸른 소나무를 벗삼고 있습니다. 눈동자가 둘인 여성분에게 푸른 소나무를 즐기게 하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이만 줄입니다. 1797년 6월 5일 제가 아룀. 초상 사건으로 근신을 하고 있던 박제가는 눈동자가 둘인 여성 만덕과 함께 어애송을 감상하지 못하고 다만 전별시를 작은 글씨로 두 편 써주었을 뿐이다. 이 편지의 수신자는 이 편지의 중간에 글씨로 박제가를 천인(薦引)한 것이 당신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아마도 금대(錦帶) 이가환(李家煥)일 것으로 추정된다.(승정원일기] 정조 18년 12월 5일 무오조에 이가환이 박제가가 글씨를 잘 쓴다고 추천하는 기사가 나온다.) 편지 마지막 부분에서 문 밖에 나가지 않고 푸른 소나무와 지내고 있어서 새옹지마의 복이 있다고 언급한 것은 초상 사건으로 근신하고 있는 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박제가가 만덕을 제주로 보내며 지은 시도 마침 유리 필름이기는 하지만 원본이 남아있다. 현재 원본의 소장처는 알 수가 없다. 이 시의 말미에는 박제가가 이 시를 쓴 날짜와 장소가 쓰여있는데, ‘丁巳夏季之三日 貞蕤居士書于長慶橋西 解語畵齋’이라 하여 1797년 6월 3일에 장경교 서쪽 해어화재에서 정유거사가 썼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박제가는 ‘정유거사’라고 하여 ‘거사’를 칭하고 있는데 초상 사건으로 관직을 잃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또 ‘해어화재(解語畵齋)’라고 하여 ‘말하는 그림’ 즉 ‘시’가 있는 집이라고 하였다. [그림5] 박제가 시고 : 送萬德歸濟州詩 만덕이 서울과 금강산을 방문하고 돌아가는 길에 쓴 전별시는 박제가뿐만 아니라, 정조의 지시로 이가환, 정약용, 김희락(金熙洛), 이희발(李羲發), 조수삼(趙秀三) 등이 전별시를 남기고 있고 채제공은 그의 전기를 썼다. 글쓴이 김현영(金炫榮) 한국고문서학회 명예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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